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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9일 목요일

두려움

  내일이란 말을 들으면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먼저 내일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하면서 우리에게 설렘의 감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일은 지금보다 더 끔찍한 삶을 예견케 하면서 두려움의 감정을 심어주기도 한다. 아마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의 인생이 끔찍한 삶의 연속이었다면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보다 더 나쁠 수는 없어!"라고 외칠 수는 있겠지만 "지금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느낌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첫사랑에 실패했던 사람이 항상 새롭게 찾아온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두려움Metus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에티카Ethica

  과거의 불행이 집요하게도 미래에 다시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 생기는 슬픔,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그렇다. 불행한 과거는 과거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잿빛 어두움을 던지기 십상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들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전체 3막으로 펼쳐지는 헨리크 입센의 '유령'은 바로 이런 잿빛 미래, 그리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묘사한 희곡이다.
  여기서 불행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은 알빙 부인이다. 기독교적 삶을 내면화한 알빙 부인은 젊은 시절 남편의 외도를 통해 너무나 커다란 상처를 받고도 묵묵히 참아온 여인이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 오스왈드를 어릴 적부터 외국으로 보내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남편의 자유분방함이 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가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오스왈드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알빙 부인은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들 오스왈드에게서 남편의 기질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령, 아까도 레지네와 오스왈드가 저쪽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 소리를 듣고 저는 마치 유령을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우리는 모두 유령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선생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이에요.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것이 귀신에 씐 것처럼 우리들에게 씌어 있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모든 종류의 소멸된 낡은 사상이나 여러 가지 소멸된 낡은 신앙 따위도 우리에게 씌어 있어요. 그런 것이 우리의 내부에 실제로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거기에 달라붙어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쫓아낼 수가 없거든요. 잠깐 신문을 집어 들어도 그 행간에 유령이 잠입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틀림없이 온 나라 안에 유령이 있는 겁니다.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은 거에요. 게다가 우리는 모두 햇빛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어요."

  오스왈드가 레지내와 시시덕거리는 것을 목격한 날, 알빙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레지내가 누구인가.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저주받은 아이 아니던가. 그러니 어떻게 그녀가 자신의 멘토였던 만데르스 목사에게 이런 두려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결국 알빙 부인에게 유령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어떤 인간의 특징들이 실체화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자유에 대한 동경, 그리고 사랑에 대한 열정 등이다. 한마디로 말해 기독교적 가치에 어긋나는 모든 것이 유령으로 실체화되면서 그녀에게 두려움이 생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유령은 어쩌면 기독교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던 알빙 부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가 유령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와 서서히 잿빛으로 시들어가 미치게 되는 사람은 오스왈드였으니까.
  오스왈드가 힘없이 읊조리는 마지막 대사가 서글프지 않은가. "태양... 태양..."이라고 우물거리면서. 오스왈드는 기독교적 가치의 어두움을 날려버릴 태양을 절망스럽게 찾고 있었으니.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6> 두려움 혹은 과거가 불행한 자의 서글픈 감정

경탄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누군가 나의 삶에 핑크빛 가득 찬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을 꿈꾸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닌가. 평범하고 심지어는 권태롭기까지 했던 잿빛 삶이 핑크빛을 띠게 되는 기적을 그 누가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기적과도 같은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 여신 혹은 신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 혹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결코 나에게 찾아오리라 기대할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 혹은 그녀의 고귀함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 없을 정도로 열등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처럼 사랑은 경탄과 함께 시작되고, 경탄과 함께 유지되는 법이다. 결국 애인에 대한 경탄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이미 덧없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랑을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 프랑스 소설가 에릭 오르세나가 자신의 소설 '오래오래Longtemps'에서 파고들었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소설은 40년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는 두 사람, 그러니까 엘리자베트라는 여자와 가브리엘이란 남자 사이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기묘할 정도로 오래 지속된 두 남녀 사이의 불륜을 다루고 있다.
  보통 불륜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일시적인 감정에서 시작되는데 성적인 관계가 반복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지기 쉽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불륜은 오묘한 구석이 있다. 정상적인 애인 관계나 부부 관계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오래' 지속되니까 말이다. 사랑에 빠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브리엘이 엘리자베트에게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바로 '경탄'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자.

"그녀의 검은 눈에서 금빛 광채가 반짝거렸다. 희로애락의 그 어떤 감정으로도 결코 꺼뜨리지 못할 장난기였다. 가브리엘은 전율을 느꼈다. 그는 여자를 잘 몰랐다. 아내가 있긴 하지만,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요컨대 가브리엘은 40년을 살도록 아직 이렇게 장난기 가득한 여왕 스타일은 만나본 적이 없다."

  가브리엘의 감정을 더 면밀히 음미하려면 스피노자의 도움을 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경탄Admiratio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 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에티카Ethica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가브리엘에게 엘리자베트는 이런 압도적인 폭포처럼 경탄을 자아내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40년을 살도록 아직 이렇게 장난기 가득한 여왕 스타일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묘사한다. 압도적 위엄을 가진 여왕처럼 느껴지는 여자, 자신을 하염없이 평범하게 만드는 여자, 당연히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는 여자... 엘리자베트는 가브리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앉은 태양"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는 엘리자베트가 오르세나의 대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의 입을 빌려 오르세나는 사랑의 비밀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혼외의 사랑은 결혼 생활과 달라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죠. 끊임없이 온갖 것을 파악해 범상함을 초월해야 해요. 아니면 차츰차츰 너절한 타성에 빠져들어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거예요."

  엘리자베트의 말처럼 관계가 "범상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너절한 타성에 빠져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경탄의 존재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애인이나 부부 관계보다 불륜이 사랑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한 조건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상적이라고 인정된 남녀 관계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범상함을 초월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경탄의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랑은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한 마디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가브리엘에게 엘리자베트는 이런 압도적인 폭포처럼 경탄을 자아내는 존재였던 것이다."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5> 경탄, 혹은 사랑이란 감정의 바로미터

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치욕

치욕Pudor은 우리가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치욕은 타인이 자신의 어떤 행동을 비난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내면에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타인이 비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이 비난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욕망은 허영일 수도 있고, 혹은 덧없는 인간의 자존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허영과 자존심이 좌절됐을 때 인간은 치욕감에 몸을 떨게 된다. 치욕을 푸는 길은 그것을 가져다준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밖에 없다.

명예욕

  명예만을 추구하던 남편이 과연 이제야 테레즈의 내면과 직면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 처음으로 남편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렇게 덧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순간, 테레즈는 이제 정말로 완전히 남편을 포기해 버린다.
"나는 솔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요. 내가 당신에게 하는 이야기는 왜 다 거짓처럼 들리는 걸가요?"
"목소리 낮춰요. 우리 앞에 있는 신사가 뒤돌아보잖소."
  베르나르는 이 순간을 끝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테레즈 역시 이 남자가 한순간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다시 영원히 멀어져 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케루(Therese Desqueyroux)'

  단지 사람들의 기분에 들기 위한 이유에서만 어떤 것을 행하거나 피하려는 노력, 이런 노력을 명예욕Ambitio이라고 말한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제3자의 시선만 의식하게 마련이다. 결국 베르나르와 같은 사람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에 몰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현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둘의 관계"라고 말이다.
  나와 너를 제외하는 일체 모든 것이 배경으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제3자의 시선만 의식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에 몰입한다는 게 가능할까. 나와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 배경으로 물러가지 않는 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3> 명예욕, 혹은 사랑하는 이를 절망시키는 감정 中

소심함

  소심함timor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우리와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활력을 주는 것이 선이고, 슬픔과 우울함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악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실내복 차림으로 경쾌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몽을 떠올리고는 그를 원래의 그 자신에게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를 영원히 보내버림으로써 잠시 슬픔에 잠기게 했다가, 예상컨대 앞으로 다가올 훨씬 멋진 수많은 아가씨들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그에게 인생이라는 걸 가르치는 데에는 시간이 자신보다 더 유능하겠지만, 그러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 그녀의 손 안에 놓인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키스했다."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중

  폴의 눈, 서른아홉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약간 주름 잡힌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연신 흐른다. 그녀는 한때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젊은 청년 시몽과의 사랑을 접으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며 자신의 삶을 장밋빛으로 물들여주었던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두 명의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폴은 지금 자신의 삶에 빛을 안겨 주었던 시몽을 떠나 6년 동안 사귀었던 바람둥이 로제에게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시몽에게 빠져 있다는 걸 견디기 힘들어하는 로제지만 시몽을 버리고 그에게 돌아가는 순간 그는 다시 자신을 외로움에 방치하리라는 사실을.
  그렇지만 폴은 두려운 것이다. 시몽은 너무나 젊지만 자신은 점점 더 늙어 갈 것이고, 언젠가 시몽은 자신에게서 어떤 매력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 로제는 지금처럼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자신을 외롭게해도 자기 곁에 가구처럼 있을 것이다.
  그렇다. 폴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미래다. 영원히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삶을 떠나 시몽을 선택하면 잠시 행복하겠지만 머지않아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로제를 선택하면 지금은 불행할 수 있지만 버려질 위험은 별로 없다. 그녀는 사랑의 위험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소심했던 것이다. 불안한 사랑보다는 불행한 안정에 손을 들어준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시몽과의 이별을 결정하면서 폴의 눈에서 흘렸던 눈물의 의미다.
  만일 자신의 결정이 행복을 선택한 것이었다면 폴의 눈물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결정이 소심함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사랑 앞에서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이 몸서리쳐지게 싫었을 것이다. 홀로 버려질 수도 있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에 현재 만끽할 수도 있는 사랑을 포기하는 자신이 너무 불쌍했던 것 아닐까? 그러니 폴도 이렇게 느꼈던 것이다.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고 말이다. 마치 시몽의 미래를 위해 헤어지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사랑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사강이 폴의 슬픈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하려고 했던 말은 사랑이란 용기 있는 자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진실 아니었을까? 50대 나이에 마약 복용 혐의로 법정에 섰을 대 사강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자기 파괴의 위험을 감당하며 사랑의 모험에 과감히 뛰어들지 않으면 순간적으로는 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편리한 안일함은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고 무겁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결국 아주 천천히 우리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파괴돼 갈 것이다. 그래서 사강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타자로의 맹목적인 비약에 어떻게 위험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의 삶과 단절해 마치 천 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건너뛰려는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랑의 꿀맛을 맛볼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2> 소심함, 혹은 작은 惡을 선택하는 비극 중

복수심

복수심Vindicta은 미움의 정서로 우리들에게 해악을 가한 사람에게 똑같은 미움으로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에티카(Ethica), 스피노자

cf.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치욕 또는 수치

  치욕Pudor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Verecundia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치욕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는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을 멀리할 수 있게 된다. 수치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을 짓을 애초에 하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은 비난받을 짓을 애초에 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강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과 감정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게이브리얼이 아내와 둘만의 은밀한 생활에 대한 추억으로 충만해 있었을 때, 다시 말해 온화함과 기쁨과 욕망으로 충만해 있었을 때 그녀는 마음 속으로 그를 다른 남자와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존재가 수치스럽다는 의식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늙은 이모들을 위해 심부름꾼 노릇이나 하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속물들에게 연설이나 해대고 자기 자신의 어리석기 그지없는 욕정을 미사여구로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소심하면서도 마음씨만은 호인인 감상주의자로, 조금 전에 거울에서 얼핏 보았던 그 애처롭고 얼빠진 녀석으로 보였다. ... (중략) 그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아내가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던 그 연인의 두 눈의 모습을 어쩌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가슴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게이브리얼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그는 여태까지 어떤 여인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감정을 몸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생전 처음으로 느껴 보는 그러한 감정이 분명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두 눈에는 더욱 흥건하게 눈물이 괴었다."
-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의 단편 '죽은 이들(The Dead)'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9> 치욕 또는 수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