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연세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연세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4년 11월 9일 일요일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마광수를 욕하던 위선의 벽이여 안녕

마광수를 욕하던 위선의 벽이여 안녕

게시됨: 업데이트됨: 
▶ 김형민 방송 피디. 에스비에스(SBS) <리얼코리아> <긴급출동 SOS 24> 등을 연출했고, 현재는 에스비에스 시엔비시(SBS CNBC) 소속으로 'SBS 생활과 경제'를 제작하고 있다. 교양 피디로서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총합이라 할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오늘의 역사를 연재한 글들을 모아 <그들이 살았던 오늘>(2012년)을 내기도 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20세기 마지막 격변기였던 1990년대를 탐험한다.
1990년대 초반 세상을 시끄럽게 달군 이름들이 많지만 그중 하나로 ‘마광수’라는 이름 석 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그는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을 내면서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보다 솔직하게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천진난만하게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가꿔 가는 사람이 ‘야한 사람’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야한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첫째가는 비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용의 서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최소한 비(B)급 태풍 이상의 충격으로 한국 사회를 강타한다. 기실 강의 중에 여학생들에게 “너희들 섹스해 봤어? 사랑하니까 섹스하는 거야. 섹스해 봐야 사랑을 알아!”라고 마르고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대던 교수란 별종일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하물며 그 생각이 책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의 충격이란.
왜 난 서점에서만 그 책을 독파했나
234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
‘사랑은 관능적 욕망 그 자체이며 인간의 행복은 성욕의 충족에서 온다’는 마광수 교수의 주장에 가장 발끈한 것은 여성계였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회지 <가정상담>을 통해 “야한 여자를 관능적 백치미의 여성으로 정의, 사고 능력이 모자랄수록 남성의 사랑을 받는다는 종속적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임신 등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혼전관계는 오럴섹스가 좋다”고 말한 마광수 교수에게 ‘마(魔)광수’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대자보가 나붙어 마광수 교수를 비난했는데 거기에는 마광수 교수의 이름을 ‘狂獸’라고 적고 있었다. ‘미친 짐승’이라는 것이었다. 비난은 좌우,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서울대학교 손봉호 교수는 “마광수 교수라고도 부를 것 없이 마광수씨라고 불러야 한다”고 일갈했고 소설가 이문열은 “구역질난다”고 내질러버렸으니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었던 셈.
물론 그를 옹호하는 축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비난의 쓰나미에 묻혀 버렸다. 그 증좌로는 나 자신을 들 수 있겠다. 고백건대 혹여 그 책을 읽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변태로 낙인찍힐까 두려웠던 나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후속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교보문고에서 몇 시간을 서서 독파했던 것이다. 그때 단상은 이랬다. “되게 솔직하긴 하네.” 하나 더 고백하자. 그러고 돌아온 학교에서 나는 후배들에게는 열심히 마광수 또라이론을 주창했다. 나는 매우 솔직하지 못했던 셈이다.
한 인터뷰에서 마광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나 빨리 순응해 버려 스스로의 본성에 정직하기 위한 투쟁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때부터 삶은 재미없어지는 거다.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저항하고 반란하라고 가르친다.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다양성과 자유를 위해.” 그의 ‘야함’에 대한 솔직한 토로 역시 그에게는 저항이었던 것일까. 군사독재라는 표현을 듣던 정부와 제도권, 그리고 그에 맞선다는 운동권조차 합세한 융단폭격을 맞으면서도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했고 그 수위를 오히려 높여갔다. 몇 년 뒤 터져나온 것이 <즐거운 사라> 사건이었다.
default
1992년 10월29일 마광수 교수는 ‘음란문서 제조 반포’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은 “지나치게 성적 충동을 자극해 문학의 예술성 범주를 벗어났다”며 사법 처리의 변을 밝힌다. 나는 그날을 꽤 명징하게 기억한다. 복학한 후 예전에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었던 도서관이라는 곳에 익숙해질 즈음, 도서관 휴게실에서 이어졌던 짧은 문답(?) 탓이다. “아니 그게 구속감이냐? 무협지 작가들, 주간지 소설 쓰는 사람들 다 잡혀가게?”라고 내가 물었을 때 한 법대생이 이렇게 답했던 것이다. “교수잖아. 레벨이 다르지. 사회적 파급력이 다르고.”
내가 이 문답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래도 운동권 물을 먹었다는 법대생 친구의 말이 신문에서 찾아 읽은 마광수 교수를 구속한 검사의 논리와 빼닮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수의 신분에 그것도 유명 대학의 교수가 공동체 존립을 저해하고 성적 쾌락이라는 개인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무책임한 소행이다. 피고인 측에서는 <즐거운 사라>는 음란 서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음란 서적 기준은 작가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는 안 되고 도서 그 자체에 대한 판단에 따라야 한다.”
이 기소장을 쓴 검사는 “수만권의 장서를 가진 독서가”였다고 한다. 그는 “단순 음란의 단죄 차원이 아닌 위기적 상황에 처한 정신적 문화적 흐름에 대한 경고”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징역 1년을 구형했고 1심에서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3년 뒤 대법원도 마광수 교수의 상고를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1990년대는 1980년대와는 달랐다.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 대한 여론이 주로 비난 일변도였다면 <즐거운 사라> 사건 때에는 연세대 총학생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마광수 교수를 지지하며 그 무죄 주장에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그들이 내건 플래카드 역시 사뭇 도발적이었다.
“마광수는 결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 이는 다른 연세대 학생이 붙인 대자보에서 지적하듯 “같은 식민지 체험을 한 국민으로서 영국인들의 제국주의적 우월감을 비판 없이 차용한 것”임에 분명했고 주한 인도대사관까지 이 버릇없는 대자보에 항의하면서 고개를 숙이긴 했으되, ‘魔狂獸’가 셰익스피어 수준으로 격상된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할 것이다. 세상은 꽤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80년대를 지배하던 도덕적 엄숙주의는 어느새 오리알 신세가 되어 낙동강 하구를 지나고 있었고 “지나친 성묘사로 쾌락주의를 조장”한다고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비판하던 이들은 점차 그 목소리에 힘을 잃고 있었다. 반면 ‘사랑’에 당당한 모습들은 좀더 빈번하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234
1980년대에 마광수 교수를 혐오하던 운동권들은 1990년대 들어 그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1992년 장편 <즐거운 사라>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구속되는 마 교수.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3년 뒤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즐거운 사라> 사건이 있던 다음해 겨울이었을 것이다. 여자 후배 한 명이 감기에 들어 몸져누웠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 이유가 희한했다. 그 추운 겨울밤 밤새 거리를 헤매다가 그랬다는 것이다. 대관절 무슨 연유로 거리에서 밤을 지새웠냐고 물어보니 같이 자취하는 여학생의 군인 애인이 갑자기 휴가를 나왔다는 것이었다. 예고 없이 나온 휴가였지만 자취하는 친구는 “나 얘하고 자야 되니까 너는 오늘 나가서 자고 와 줘”라고 서슴없이 요구했고 밤 11시에 졸지에 쫓겨난(?) 여자 후배는 오갈 데 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자취생의 군바리 애인이 집을 떠난 뒤에야 몸을 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들으며 복학생들은 하나같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여관으로 가야지 왜 함께 자취하는 사람을 쫓아내며, 추운 겨울날 애인과의 시간을 보장받기 위해 친구를 내쫓는 못된 처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소매를 걷었던 것이다. 그때 흥분하던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우리 같으면 그냥 다 같이 술 먹고 방구석에 제각각 자빠져 곯아떨어졌을 것 같은데. 요즘 애들 참.” 얼씨구 나이 몇 살이나 더 먹었다고 ‘요즘 애들’ 타령이냐고 비웃으면 할 말은 없지만 뭔가 세상은 다른 세상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1990년대에도 인적이 드문 캠퍼스의 심야 시간, 심심찮게 강력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따른 자체 규찰대가 조직돼서 야간 순찰을 돌았다. 이 규찰대들은 우범지대(?)를 돌면서 캠퍼스에 스며들어 음주가무를 즐기는 고등학생들을 쫓아내거나 취한 학생들의 싸움을 말리는 등 활동을 벌였는데 그들의 또다른 단속 대상 중 하나는 ‘캠퍼스를 여관 삼아’ 사랑을 나누는 청춘들이었다. 청춘들의 남녀상열지사야 70년대건 80년대건 숱하게 있었겠지만 당시 규찰대 활동을 하던 후배가 침을 튀기며 해준 얘기에 따르면 당시 심야의 캠퍼스에도 실로 많은 커플들이 그들만의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당시 규찰대의 무용담(?)을 듣다가 깔깔대고 웃은 대목이 있었다.
규찰대가 등장하여 플래시를 비추거나 인기척을 내면 대개는 화들짝 놀라서 주섬주섬 옷 챙겨 입고 사라지는 것이 상례였는데 어느 한 남학생이 규찰대에게 거칠게 대들어 ‘신성한 캠퍼스’에서의 풍기 문란 행위를 단속하던 규찰대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외치며 규찰대원들을 몰아붙였다 한다. “당신들은 안 하고 살아? 신성한 캠퍼스? 이것도 신성한 일이야!” 이 말은 한동안 유행어가 됐었다. “당신들은 안 하고 살아?” 그 말을 들으며 폭소를 터뜨린 다음 슬그머니 차오른 의문들이 있었다. 규찰대는 왜 그 청춘들의 ‘거사’를 굳이 방해하고 플래시를 비추며 ‘아저씨!’를 부르짖어야 했을까.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닌데 왜 ‘단속’의 대상이 돼야 했을까.
234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그때껏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좋게 말하면 엄숙주의, 나쁘게 말하면 위선의 벽이 깨져 나가는 과정이었다. 밤이면 지하 세계에 펼쳐진 음습하지만 휘황한 공간에서 온갖 추잡한 욕망을 다 발산하다가 낮에는 짐짓 성도덕의 문란을 한탄하던 어른들의 세계는 말할 것도 없다.
더하여 ‘조직 내 연애 금지’를 내걸고 혁명가연하던, 술 먹고는 포르노 나오는 여관을 찾아 헤매고, 다음날 오후에는 전두환의 3에스(S) 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 비판에 열을 올리던 이들조차도 노골적일 만큼 솔직해진 욕망들의 거침없는 지적 앞에 발가벗은 임금님 신세가 돼 머리를 긁적이던 시기였다는 뜻이다.
1994년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엉덩이가 예쁜 여자’ 정선경에게 달라붙어 욕망을 채우는 중 운동권 청년이 부르짖던 ‘파쇼 타도’는 그 벌거벗은 임금님들에 대한 최대한의 조롱이었다. “파쇼 타도? 흥 니들은 안 하고 사니?” 하는.
1997년 6월 열린 한국여성학회 13차 춘계 학술대회에서 나온 이화여대 김은실 교수의 일성은 90년대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90년대에 이르러서는 마치 성적이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성이 상품화되고 상품이 성화되는 일상에서 성적 매력을 사회적 자본으로 사용하는 여성이 해방된 여성이라고 인정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도 등장하고 있다.”
“섹시하다”는 말은 칭찬이 되고…
234
1980년대 말, 아니 90년대 초만 해도 날렵한 청바지를 입고 온 여자 동기에게 “오 섹시한데?” 했다가는 “어휴, 짐승”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손칼을 맞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빠르게 ‘말과 행동에 성적(性的) 매력이 있다’는 뜻의 ‘섹시하다’는 형용사는 칭찬의 의미로 바뀌어 쓰였다. 즉 성적 매력을 보유한 것이 자랑스럽고 그를 찬미해 주는 게 부자연스럽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1996년 2월4일치 매일경제신문에 따르면 전국 20대 여성 500명에게 “남성들로부터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1위 예쁘다, 2위 지적이다에 이어 ‘섹시하다’는 당당 3위를 차지하고 있다.(장담컨대 2위와 3위의 순위는 1년 내에 변경됐을 것이다) 또 섹시하다는 말에 대한 선호도는 여사원(20%)이나 기혼여성(15%)보다 여대생들로부터 그 선호도가 높았다.(26%) 즉 나이가 젊을수록 ‘섹시하다’는 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것이다.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예의와 거리낌을 두지 않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에 대해 비난과 눈 흘김의 강도가 점차 줄어들던 시기가 90년대였다. 애인과 함께 여름휴가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된 시기였고, 영화도 아닌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이 전라로 출연한다는 소식에 복학생들이 술값 아낀 배춧잎 꺼내 들고 대학로로 집결하던 때였다.
동시에 이 도도한 적나라(赤裸裸)의 물결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고 둑을 쌓고 수갑을 꺼내 들고 치도곤을 꺼내 드는 사람들이 설치던 과도기이기도 했다. 그 서슬에 마광수 교수가 당했고 영화 <거짓말>과 <노랑머리>가 가위질당했고 연극 <마지막 시도>의 연출자는 구속을 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게 쥐면 쥘수록 새어 나오는 모래처럼 사람들은 바뀌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2014년 9월 18일 목요일

[CNB저널] 모종린 연세대학교 교수(국제처장) 세계화는 국익/글로벌기업의 원천 "MB정부 비해 세계화 후퇴했다"

[CNB저널 제393호] / 등록일 : 2014.08.28 08:59:17

[인터뷰 - 모종린 연세대학교 교수(국제처장)]세계화는 국익·글로벌기업의 원천 “MB정부 비해 세계화 후퇴했다”

‘작은 도시 큰 기업’ 책 출간…지역에서 세계적 기업 나와야 국가발전

사진 = 이성호 기자
▲ 사진 = 이성호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모종린 연세대학교 교수 겸 국제처장은 잘 알려진 ‘세계화 전도사’다. 그동안 한국이 급성장한 비결이 세계화에 적극적이었던 때문이었고, 향후의 미래도 세계화 이슈를 어떻게 잘 풀어나가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영어 상용화, 이민정책, 외국인 투자 등 다양한 부문에서 목소리를 내던 그가 이번엔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해 ‘작은 도시 큰 기업’이라는 책을 냈다. 해외 사례를 통해 국내 지역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보고 싶었다는 모종린 교수를 만나봤다.』


모종린 교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떠났다. 코넬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텍사스 오스틴대 정치학과 조교수,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고 1996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현재 연세대 국제처장 겸 국제학대학원 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위원, 세계화연구센터 연구소 원장 등 직함이 다양하다.

연세대에서 국제정치경제학을 학부와 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고 연구를 제외한 대외활동은 원장으로 있는 세계화연구센터를 통해 진행 중이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세계화다.


- 세계화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한국에서 18년 살다 미국 가서 17년 살고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지 18년 됐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오니 한국에 대한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래서 세계화와 세계 공헌 분야에 집중하고 있고, 한국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게 제 역할이라 생각한다.

사실 처음에는 대학에서 연구하고 자리 잡는 데 여념이 없어서 사회문제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화를 위해 연세대가 설립한 언더우드국제대학은 영어로 강의한다. 이곳에서 2005년부터 3년간 초대 학장을 지내며 세계화 이슈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학장으로 있으면서 정부나 기업체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화를 원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수출과 해외진출에 대해서는 개방적이지만, 수입과 외국인 투자, 이민에 대해서는 폐쇄적이다. 올해도 외국인 투자는 낮은 규모이고 수입도 원자재를 빼면 소비재 수입이 거의 없다. 영어 문제도 심각하고 교육 부문에서도 민족 교육·국민 교육이 너무 강하다. 다문화 사회를 만들자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전혀 준비가 안됐다.

변화에 적응을 잘하고 거부하지 않는 다이내믹한 국민성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이민 문제나 수입, 외국투자 문제도 변화할 수 있다고 보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진한 것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는 여러 주제들, 특히 대학입시제도나 이민, 지방 문제, 외국인 투자 등 세계화 이슈에 대해 나름대로 기여하기 위해 이들 주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게 됐다.

영어상용화를 주장한 ‘영어상용화와 국가경쟁력(2010)’, 한국의 국제적 역할을 강조한 ‘국제기구 개혁과 미래(2010), 외국인 투자의 중요성을 역설한 ’시장경제와 외국인 투자 유치(2010), 이민 확대를 주장한 ‘이민강국(2013)’과 지역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작은 도시 큰 기업(2014)’를 집필한 이유다.


- 그래도 많이 세계화되지 않았는가? 연세대는 특히 세계화된 대학으로 알려져 있는데?
외부에서 연세대를 가장 세계화되고 개방된 대학이라 하는데, 옛날 얘기다. 이젠 다른 학교도 많이 따라와서 연세대가 다른 데보다 더 개방됐다고 보기 힘들다. 외국인 학생 수나 외국인 교수 수를 보면 10위 정도로 선두가 아니다. 질적으로 앞선 부분은 있겠지만 가장 세계화된 대학은 아니다.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나마 국제학대학원은 외국인 비율이 50%로 연세대 전체 외국인 학생 비율 5%보다 훨씬 높다. 국내에서 가장 국제화된 교육기관이라 봐도 좋다. 한편, 미국 대학은 10%, 홍콩·싱가폴 대학은 20% 정도라 한국 대학의 외국인 비율은 많이 낮다. 전체 인구로 봐도 그렇다. 국내 외국인 비율은 3%인데, OECD 평균은 8%~9%다. 현재 외국인 숫자가 107만 명 내외인데, 500만 명은 돼야 OECD 평균이 된다.


-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공적개발원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런 이유인가?
이명박 정부 때 ‘글로벌 코리아’라 해서 ODA를 많이 늘렸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중견국 외교’라며 다양한 사업을 많이 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다. 현재 한국의 ODA 규모는 국내 GDP의 0.1% 정도인데 OECD 평균은 0.35%다. OECD 전체 국가가 이를 0.7%로 올리자고 약속했다. 우리는 2020년까지 0.2%로 늘리려했는데 새 정부 들어서 고용, 복지 이슈가 중요해지니까 미뤄지고 있다.

현재 해외 기부나 지원에 대해 국민적 저항은 거의 없다. 국민정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우리 국민들은 외국을 돕는데 대해 자부심도 강하고 반대가 크지 않다. 사실은 정치인들이 ODA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국민 핑계를 대는 거다. 정치인들은 표가 있은 곳에만 가는데, 외국인들은 표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지역구 예산에 더 관심이 갈 것이다. 정치인들이 나서기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면 대통령의 리더십이 필요한데,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에 비해 미온적이다.

모종린 교수의 저작들. 사진 = 이성호 기자
▲ 모종린 교수의 저작들. 사진 = 이성호 기자

- 세계화가 후퇴하고 있는 구체적 정황은?
우리나라 전반적으로 세계화에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 조기유학이 50% 줄었고, 영어공용화, 상용화에 대한 관심도 줄었고, 외국인 고용에 대해서도 관심이 줄었다. 글로벌 리더십 부문도 이명박 정부 시절보다 줄었고, 외국인 투자, 이민 모두 관심이 줄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반감이 퍼져 정부의 개입과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게 된 분위기가 자리 잡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삼성이나 한류가 해외에서 성공하다보니 한국 방식이 좋고 외국에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5년 전, 10년 전에 비해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고 있다. 학교, 기업, 정부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치고 올라오고 있다. 일본은 아베 정부 들어서 그간 한국에 뒤진 이유를 “한국이 세계화를 잘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그래서 “일본 학생 20만 명을 내보내겠다. 가사도우미 시장을 개방하겠다” 등 이민과 해외유학, 외국인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일본보다 세계화 분야에서 낙오할 우려가 있다.

사실 우리는 그간 세계화를 잘 활용해온 나라다. 국제무대에서 성공한 분들도 많고, 세계적으로 큰 대기업도 많다. 문제는 정치 지도자들이 세계화가 덜 됐다. 경제를 주도하는 분들은 대개 세계화된 분들인데, 정치를 주도하는 분들은 주로 국내파이기 때문에 괴리가 발생한다.

특히 우리나라 선거가 정책으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 인맥 위주라 글로벌 마인드를 가진 능력있는 사람들이 정치계에서 성공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가진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 최근에 집필한 ‘작은 도시 큰 기업’은 어떤 책인가?
지역 문제를 다뤘다. 우리나라 진보진영이 말하는 지역불균형과 균형발전은 공공기관 이전, 혁신도시 등이다. 부의 재분배 관점에서 수도권은 규제하고 다른 곳은 풀어주는 방식이다. 반면, 보수진영은 서울의 경쟁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상하이나 도쿄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서울 규제는 바람직하지 않고, 지역 문제가 세계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지역이 같이 발전할 수는 없다는 관점이다.

저는 이 문제를 창업이나 큰 기업 육성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봤다. 공공기관 이전해봐야 사람들이 가지도 않고, 지역사회와 통합도 안 된다. 지역으로 이전하는 공공기업에 과연 지역사람이 취업할 수 있는가? 서울 사람이 들어가고 싶은 기업을 지역이 못 만들면 진정한 지역 발전은 어렵다. 각 지역에서 세계적 기업이 나와서 서울에 있는 사람도 회사 때문에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그런 것이 정상적인 균형발전이라 본다.

그래서 한국이 예외적인 상황이란 걸 알리고 싶었다. 다른 나라는 조그만 도시에 세계적 기업이 있고,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데, 왜 우리나라는 부산조차도 포기하고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책에서 소개한 홀푸드마켓과 델컴퓨터 본사가 있는 미국 오스틴에서 교수로 있던 당시, 오스틴 사람들은 자신들은 천국에 산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는 천국이라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네 자연, 음식, 문화에 대해 거의 종교에 가까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애향심이다. 지역이 발전하려면 애향심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야 한다. 서울 올라가 성공한 사람만 롤모델로 생각하는 우리나라 토양에선 애향심이 만들어질 수 없다.


- 책에서 소개한 작은 도시들과 울산, 수원, 포항 같은 기업 도시는 어떻게 다른가?
서울 기업의 공장이 지방에 있는 것일 뿐, 지역에서 지역 주민이 만든 회사가 아니다. 현대자동차의 법적 본사가 울산에 있고 포스코도 포항에 있지만, 울산 기업, 포항 기업이라 보기 어렵다.

공장을 지원하기 위해 기업 도시라는 제도를 도입해서 많은 개발 혜택을 주고 있는 것뿐이다. 지역의 자생적인 창업 기반, 독립적인 경제 기반이 없는 것이다. 서울 기업의 공장을 유치한 것에 불과하니,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큰 기업을 키운 작은 도시라고 볼 수는 없다. 판교의 IT기업단지나 제주도로 이전한 다음, 넥슨의 사례도 있는데 이 역시 서울 기업의 이전으로 지역 창업 사례는 아니다.

문화 정책과 도시 정책, 경제 정책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지역이 서울과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가져야 한다.

일본 교토를 예로 들자면, 쿄세라, 닌텐도, 와코루, 산토리 등 대기업들과 옴론, 일본전산 등 한국이 제일 부러워하는 일본 강소기업 10개 중 6개가 교토에 있다. 교토는 동경에 대해 반골 정신이 강하다. 1860년대까지 교토가 일본의 수도였기 때문에 일본 문화의 중심이고 일본 정신을 대표한다는 자존심이 있다. 도쿄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부패됐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존심, 문화적 차별성이 교토를 도쿄와는 다르면서도 경쟁력있는 도시로 만들었다.

사진 = 이성호 기자
▲ 사진 = 이성호 기자

- 국내에서는 왜 교토같은 사례가 만들어지지 못했는가?
교토처럼 과거 수도였던 도시들이 그런 특성이 있다. 개성이 만약 그대로 남았다면 교토같은 도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개성 사람들을 차별해 정부에 등용하지 않으니 중인이 되고 상업에 종사했다. 소위 개성상인이다.

교토가 도쿄에 경쟁의식을 가진 것처럼, 과거 개성도 한양에 경쟁의식을 가졌다. 독특한 음식 문화가 있었고, 산업 자체가 달랐다. 그 사람들이 그걸 계속 이어갔고, 나중에 서울에 와서도 검소하고 독특한 경영문화를 이어갔다. 아모레퍼시픽, 신도리코, 동양제철화학, 에이스침대 등 수많은 기업들이 개성상인의 후예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렇듯 지역마다의 자부심, 정체성이 중요하다. 국내의 대구나 광주의 경우 정치적 자부심은 있지만, 경제·문화적 자부심은 부족한 것 같다. 부산이 한때 자부심이 있었는데, 2등 도시로 오랫동안 침체를 겪다보니 포기한 것 같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정체성을 찾고 있는 도시는 제주, 전주, 통영, 안동 등이다. 개성있고, 자기정체성이 강한 도시들이다. 결론적으로 지역의 문화정체성이 중요하고, 이걸 ‘라이프스타일’이라 표현했다.


- 국내에서 ‘작은 도시 큰 기업’을 이룰 방안은?
일단 우리나라 상황이 비정상적이란 것,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서울과 지역 격차, 서울 집중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패배주의에 빠져있는데, 이것부터 바꿔야한다. 그래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교육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 교육 과정에 지역 교육이 없다. 우리 지역의 역사나 문화, 전통, 인물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한다.

방송 같은 데서 지역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문제다. 그리운 곳, 30년 전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만 다루고, 소박하고, 힐링할 수 있는 곳으로만 표현한다. 살고 싶은 곳, 화려하고 앞서고 역동적이고 상류사회적인 곳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지역에 가면 의외로 화려하고 잘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보여주지 않는다.

지역의 경쟁력 있는 기업들도 많다. 마산의 무학소주는 국내 3위 브랜드다. 이외에도 국내 3~4위 하는 소비재기업들이 지방에 많다.

세계적 기업은 아직 나오고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른 나라기 때문에, 성공사례가 한둘 나오면 금방 변화할 수 있으리라 본다.


- 향후 집필계획은?
앞으로도 세계화 이슈에 주력할 계획이다. 그간 다뤄왔던 이슈들, 영어상용화, 이민, 지역, 창업 문제 등을 계속 연구하겠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산업화, 민주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 개발에 관심이 많다. 산업화, 민주화 이후는 문화의 융성, 창조경제라고 본다. 경제발전, 정치발전, 문화발전 순으로 발전이 됐는데, 다른 나라들도 밟는 일반적 코스다. 문화발전이 경제와 정치에 도움이 되도록, 우리나라 도시도 문화와 창업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문화발전과 문화경제학 분야를 연구할 계획이다.

- 정의식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정의식 기자 [CNB저널 제39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