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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허핑턴포스트] 땅꽁 부사장과 찌라시 대통령

땅꽁 부사장과 찌라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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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7일. 종신 대통령으로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국회를 해산할 수 있도록 한 유신헌법이 탄생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는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해 주권을 행사한다"로 바뀌었다. 민청학련 사건을 포함해 김대중 납치사건과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등이 모두 그 이후에 벌어졌다. 양성우 시인이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자근자근 짓밟아내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라고 물었던 '겨울공화국' 이었다. 김수희의 "떠날 땐 말없이 떠나가세요. 날 울리지 말아요.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당신은 너무합니다"란 노래가 국민 애창곡이 된 것도 당시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위헌이었던 긴급조치로 연명했던 제4공화국은 1979년 비극적으로 끝났다. 1987년 국민은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권력층은 겸손해졌고 정치는 투명해졌다. 반칙과 비리는 줄었으며 국민을 머슴처럼 부리는 일도 드물었다. 국가의 위상과 국민의 자긍심도 높아졌다. 외환위기라는 큰 파도 역시 잘 극복했다.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 부었기에 차마 40년 전의 풍경을 다시 만날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라는 시를 다시 읊조릴 줄은 정말 몰랐다.
땅콩 하나와 찌라시 정도라고 말하지 말자. 한 번의 실수라는 말도 하지 말고 너나 잘하라는 말은 더구나 하지 말자. 지도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깜냥, 시정잡배도 혀를 내두를 천박한 도덕성, 후안무치의 책임 회피를 두고 철없는 이념 논쟁도 하지 말자. 제 손에 흙 한 번 묻힌 적이 없는 이들이 4천만의 공동체를 제멋대로 분탕질하는 것을 침묵하지 말자.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자. 얼마나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인가를,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를, 평범한 우리가 갖고 있는 권리를 생각해 보자. 질문의 출발점은 권력의 민낯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조현아 사장은 25살에 입사해 7년 만에 임원이 되었다. 겨우 40세에 대한항공 부사장, 칼호텔, 왕산레저개발과 한진관광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능력이나 인품과 무관한 무임승차다. 박근혜 각하 역시 다르지 않다. 1998년 달성군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는 과정은 쟁취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남 표를 의식한 정치 공학의 산물이었다. 뒤이은 국회의원 연임과 대통령 당선 역시 부친의 후광 덕분이다. 제 손으로 일군 게 없으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국정원의 불법 선거를 조사하던 채동욱 검찰총장은 가장 치욕스런 방법으로 쫓겨났다. 정윤회씨를 비판했던 문화부 국장과 과장은 영문도 모른 채 좌천을 당했다. 매뉴얼을 따랐던 사무장과 승무원이 욕을 먹고 폭행을 당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잘못이 밝혀져도 오히려 거짓말을 하고 주변을 겁박해 진실을 왜곡하는 것조차 판박이다. 탁월한 식견이 있는 것도 남다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만 옳다. 공정하지도 않고 원칙도 없다. 국가와 회사에 도움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천문학적인 손해를 끼친다.
대한항공은 사유물이 아닌 국민의 애국심은 물론 임직원, 채권자, 협력회사와 고객의 합작품이다. 막대한 돈과 노력으로 쌓아올린 회사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박 대통령이 국가에 미친 해악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룬 모범 국가의 이미지는 이미 퇴색했다. 언론을 탄압하고 독재국가로 회귀한다는 비난은 낯설지 않다. 제 자리에서 성실히 일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서 정의는 죽어간다. 문고리 권력이 제멋대로 국정을 쥐락펴락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질식 직전이다. 북한을 비롯해 일본, 중국과 러시아 등 국제사회와 구축한 신뢰도 바닥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엎을 수도 있다. 제 아버지만 믿고 기고만장했던 조 사장은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국민의 분노는 이미 그를 넘어 조회장 일가로 확산되고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 여론이 여전히 40%를 넘는다는 것이 크게 위안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인류 역사가 증명하듯 권력이 힘을 잃을 때 가장 잔인해지는 것은 항상 국민이었다. "너무 합니다"란 노래가 송년회 자리에서 더 높아지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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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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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EEL DOWN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우리에게는 난해하기로 소문난 책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오늘날의 독일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대인이었던 아도르노는 나치가 집권하자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프롬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동료 학자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고, 서독이 세워진 직후인 1949년 독일로 돌아와 1969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
독일로 귀환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독일이 다시는 나치즘과 같은 야만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완전히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이 바로 과거청산이었다. 오늘날 독일이 '과거청산의 나라', '역사 민족'이라고 불리며 주변국들로부터 도덕적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연합의 중심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도르노의 역할이 컸다.
아도르노는 과거청산이 제도적·인적 청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왜냐하면 "과거청산의 본질적인 문제는 드러내놓고 극우적인 집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남아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위협하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강조한 것이 '반권위주의 교육'과 '비판교육'이었다. 권위 앞에서 쉬이 순종하는 '약한 자아'가 민주주의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이기에, 학생들의 비판의식을 고취해 강한 자아를 가진 시민으로 길러내는 것이 민주주의 교육의 요체라는 것이다. 그는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부당한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맞서는 능력을 키워줄 '저항권 교육'을 특히 강조했다. 이는 오늘날 독일 교육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교육부의 기본지침에는 "수용할 수 없는 지배관계와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능력", "저항기술에 대한 지식", "개혁적 혹은 혁명적 성격의 기획을 실현하는 능력", "주어진 사회적 규범을 자유로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규범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독일은 - 일본과는 달리 - '반권위주의 교육', '비판교육', '저항권 교육'을 통해 나치즘의 과거를 성공적으로 청산한 '과거청산의 모범국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숨겨진 본성을 처연하게 드러낸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왜소한 존재인지, 사회적 약자가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국 자본주의가 얼마나 천민적이고 야만적이며 재벌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폭력적인지, 우리는 새삼 확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근의 사건들이 보여준 것은 우리가 여전히 권위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항공기 사무장이 무릎 꿇고, 승무원이 무릎 꿇고, <카트>의 계약직 노동자가 무릎 꿇고, <미생>의 직장인들이 무릎 꿇고, 강남의 아파트 경비원이 무릎 꿇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부당한 권력의 폭력성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현시한다.
'무릎 꿇는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니다.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려면 이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갖춘 민주주의자를 학교에서 길러내야 한다. 더 이상 무릎 꿇는 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의 권위주의적 구조와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민주주의 교육', 특히 '저항권 교육'이 시급하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