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대통령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대통령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6년 9월 13일 화요일

[Designersparty] Seoul, Korea, 1960's photographer Unidentified














독일 [Germany, 獨逸] , 1960's
photographer Unidentified
1963년 광부 247명이 처음 독일에 도착하였고 모두 3년간 취업 계약을 맺었는데 1977년까지 8,395명의 광부가 독일 석탄 광산에서 일을 했고 1965년부터는 한국인 간호사의 독일 취업이 허용되어 1976년까지 모두 1만 371명이 역시 3년을 계약으로 독일로 떠났다.
1963년에서 1977년까지 7936명의 광부와 약 1만여 명의 간호사가 서독에 파견되었다.
실업과 가난에서의 탈출을 꿈꾸던 젊은이들의 독일 파견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뿌리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독일 광산의 인력 수요가 컸는데, 독일은 한국 광부들을 통해 인력 부족 현상을 해소시키고자 했다. 이로 인해 이른바 ‘서독 파견 한국 광부 임시 고용계획’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 차례 문서교환이 이루어진 후 1963년 12월 7일, 16일 협정이 발효되었다. 이 협정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독일이 유럽권 밖의 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협정이었던 것이다.
양국 간의 이와 같은 합의는 당시 자금이 필요했던 한국의 이해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독일로 파견된 인력들이 한국으로 돈을 송금하는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이 협정으로 인해 또 다른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약 30%에 육박하던 한국의 높은 실업률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초의 광부협정은 커다란 기회였다. 게다가 당시 해외 출국 규제가 엄격했기 때문에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지원율은 매우 높았다. 100여 개의 자리에 최대 2,500명이 몰려들었으며, 고등학교 및 대학교 졸업자가 60% 이상이었다.
독일은 당시 광부뿐만 아니라 간호사도 필요로 했다. 독일의 여러 수도회와 한국 내 독일 가톨릭 교회는 1950년대 말부터 이미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 파견을 중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부협정에 상응하는 한국 간호사의 독일 파견에 관한 공식 협정은 1971년 7월 26일에서야 비로소 체결되었다.
한국인 광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간호사들 역시 독일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다. 이들은 전문적이고 친절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고용계약도 연장되었다. 몇몇 간호사들은 한국인 광부들과 결혼하기도 했고, 한국에 있는 남편을 독일로 불러오기도 했고, 독일인과 결혼하기도 했다. 3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한국 간호사의 절반 이상이 독일에 남았다. 이들은 오늘날 한·독 우호관계의 주축이라 할 수 있다.
간호사들과 함께 한국인 광부들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 동시에 이들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어 한국의 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
기획 Designersparty http://www.designersparty.com/

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경향신문] 뉴욕타임스 광고에 등장한 두 여성 대통령

일반
뉴욕타임스 광고에 등장한 두 여성 대통령
뉴욕|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24일자 뉴욕타임스에는 두 명의 여성 대통령이 광고면에 각각 등장했다. 각각 박근혜 대통령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비판하는 광고였다.

뉴욕타임스의 뉴욕판 11면에 실린 전면광고는 박 대통령의 사진 위에 “한국에서 진실과 정의는 무너졌는가?”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 대응의 적절성과 5개월이 지난 지금 유족들을 몰아부치는 그의 태도를 비판하고,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법원이 국정원장에게 선거법 무죄를 선고한 것을 지적했다. ‘한국민주주의운동’이 광고 주체로 돼있다.

뉴욕타임스 9월24일자에 실린 세월호 사건 광고
“불건전함의 모델”이라는 제목이 달린 페르난데스 대통령 비판 광고는 2001년 아르헨티나 디폴트 선언 당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권자들이 낸 광고다. 헤지펀드들이 주축이 된 이 광고는 미국 법정에서 아르헨티나 정부 상대로 진행중인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낸 것이다.

뉴욕타임스 9월24일자에 실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비판 광고

2014년 7월 11일 금요일

[조선일보] 盧대통령 영어통역은 외교부 '악바리'

[주말매거진] 盧대통령 영어통역은 외교부 '악바리' (2003.05.22)


“노 대통령의 영어 통역사가 누구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지난 11~17일 미국 방문 이후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는 이런 질문이 많았다. 1주일간 노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수려한 외모에 완벽한 영어로 세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주인공은 외교통상부의 이여진(李如 ·29) 외무관.

비슷한 연배에 역시 영어 잘하기로 소문난 김일범(金一範·30) 외무관이 대통령의 방미에 동행했지만 이 외무관의 그늘에 가려진 탓인지(?) 그의 모습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97년 31회 외무고시에 합격, 북미1과와 통상교섭본부 다자통상협력과에서 근무했던 이 외무관은 새 정부 들어 아예 청와대 의전실에 파견 나가 있다.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서다.

건설교통부에서 오랫동안 해외 주재관을 지낸 부친 이부식(李富植) 교통개발연구원장을 따라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덕분에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힌 그는 외교부 내에서 ‘악바리’로 통한다.

99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로스쿨(Law school)로 2년 연수를 떠났다가, 3년짜리 전 과정을 정복하기 위해 연수를 마친 후 아예 1년 동안 외교부에 휴직계를 내고 일종의 법학박사 학위에 해당하는 ‘JD(Juris Doctor)’를 따냈기 때문이다. 외시 동기생들조차도 이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인데, 아직 미혼이어서 동료 외교관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외교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98년쯤 남북한과 미국·중국이 참가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를 논의했던 ‘4자회담’의 우리측 통역으로 들어갔는데, 미국측의 대표 한 명이 “도대체 한국 통역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라고 반농담을 던진 것이 자극제가 돼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 수행 직후 통역자는 언론과 인터뷰를 일정 기간 할 수 없도록 한 정부 규정에 따라 이 외무관을 기자가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이 외무관 말고도 외교부에는 20·30대의 새내기급 외무관들이 대통령의 통역을 직접 맡아 외교가 안팎에서 화제다. 우리 정상이 일본·중국의 고위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함께 볼 수 있는 장혜령(張惠玲·31)씨와 여소영(呂昭詠·28)씨 등이다.

일본인조차 어떨 때는 일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의 능숙한 일본어 실력을 자랑하는 장씨는 기업체에 근무했던 아버지의 일본 근무로 소학교(小學校) 5·6년 과정을 도쿄(東京)에서 지냈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91학번으로 대학 시절부터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통역 경험을 하면서도 장학금을 거의 놓치지 않았고, 97년에는 한국외국어대 동시통역대학원 한-일과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99년 일본어 통역전문요원으로 별정직 5급에 특채되기 전에는 화장품의 CF모델, 케이블TV의 강사, 공중파 방송의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편안한 통역과 해맑은 미소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

이에 비해 대만국립대에서 학부·석사과정을 마친 여 외무관은 진지함이 강점이다. 중국의 경구 ‘배움에는 끝이 없다(學無止境)’를 생활신조로 삼는 여씨는 중국 현대어에 정통하고, 이를 완벽하게 소화한다고 한다. 2001년 다이빙궈(戴秉國) 당시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방한했을 때의 일. 한승수(韓昇洙) 외무장관과의 면담을 마치고 나오던 그는 기자에게 “난 저 통역(여씨)분이 우리 중국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어찌나 고전과 현대어에 해박하던지 놀랐습니다. 저런 인재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대단합니다”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장래 계획을 묻자 여씨는 “중국어도 계속 공부해야겠지만, 이제 배필도 만나고 싶다”고 했다.

통역의 세계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화려하게 비칠지도 모르지만, 고도의 세밀함과 인내력도 요구하기 때문에 상상치 못한 고통이 따른다고 한다. 그럼에도 실제 통역업무를 맡고 있는 이들은 “우리나라를 알리는 자부심과 긍지에 힘든 줄 모른다”면서 “믿음직한 젊은이들이 보람 있는 현장에 더 많이 뛰어들기를 기대한다”는 바람을 잊지 않았다.

(권경복기자 kkb@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