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0일 일요일

백영옥 소설가의 [Why] [그 작품 그 도시] 남녀 사이에 우정이 가능?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 맨해튼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감정 없이 섹스하는 친구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이 신조어는 낡은 이슈 하나를 끌어낸다. 남자와 여자의 우정은 가능하냐는 질문. 나는 연애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제거한 듯한 이 신조어의 핵심이 '섹스'가 아닌 '이별 형식'에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다. 연애란 우리 시대 인간의 가장 복잡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연애의 '만남'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부지런히 개발 중이다. 결혼 정보 회사, 미팅 사이트, 일 년이 멀다 하고 증식 중인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각종 소셜네트워크. 하지만 이별과 관련해 우리가 받는 감정적 '애프터서비스'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극심한 상실의 고통이 인생을 마구 뒤흔들기 때문에 생긴 관계의 발명품이란 게 내 생각이다. 이별 살인, 카톡 이별, 이별과 관련된 수많은 병적 사례가 이것을 증명한다.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의 배경이 된 맨해튼의 풍경. 맨해튼은 뉴욕의 중심이자 미국 젊은이들의 욕망이 꿈틀대는 곳이다. / 조선일보 DB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의 배경이 된 맨해튼의 풍경. 맨해튼은 뉴욕의 중심이자 미국 젊은이들의 욕망이 꿈틀대는 곳이다. / 조선일보 DB
헤어지던 순간, 카톡으로 서로 '정중하게' 욕을 하며 헤어지는 사람들에 대해 얘길 했던 남자가 있었다. 핵심은 '쌍욕'을 하되 '정중한 태도'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요즘 시대의 새로운 '쿨'이란 맥락이었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단점'을 감추기 위한 '장점'이란 결국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마치 '나쁜 살인은 나쁘다' 또는 '좋은 살인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칼자루를 거꾸로 쥐고 상대를 찌르려고 할 때, 자기 자신이 먼저 찔린다는 걸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

심리학에서 꽤 유명한 실험이 있다. 사람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 첫째, 며칠 후 당신에게 10만큼의 무엇을 주겠다. 하지만 그전에, 당신이 가진 7만큼을 먼저 빼앗겠다. 분명 준다고 약속한 양이 빼앗는다고 약속한 양보다 많다. 합리적으로 사고한다면 먼저 빼앗긴 후, 나중에 받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결심을 시험하면 매번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이 불안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더 주겠다는 제안보다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빼앗겠다는 의견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받아들인다. 새롭게 얻는 것보다 가진 걸 빼앗기는 고통을 훨씬 더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단절'로 끊기는 고통의 양을 최소화하고, '연결'로 시작되는 쾌락의 양을 증폭시키려는 인간적인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쾌락이란 과잉을 존재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끝내는 결핍의 감정을 만들어낸다.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요즘 유행한다는 '반(半)동거 커플'처럼 고통 때문에 인간이 발명한 수많은 신종 관계는 역설적으로 제대로 발명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최대 발명품인 '사랑' 역시 요즘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선 특히 돈, 가족, 질병, 스펙, 변수가 너무 많다. 그래서 만들어진 신규 관계는 점점 더 많아진다.

자본은 끝없이 사랑을 권유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경멸한다. 사랑 때문에 결혼 시장이 열리고, 결혼 시장 때문에 신규 부동산 시장이 열리고, 출산과 사교육, 불륜 시장이 열린다. 자본주의에서 사랑과 연애를 강권하는 건 사랑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주요 이념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이토록 많은 발라드가 남발된 시대는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랑 노래, 이별 노래가 득세하던 때가, 이렇게 많은 사랑 영화와 드라마가 창궐하던 시대도 없었다. 이 시대는 남자가 필요 없는 건어물녀를 비정상이라 선언한다. 여자보다 게임이 좋은 식물성 남자를 잠재적 임포텐스라 진단한다. 눈 맞아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출세하려는 욕망이 소비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의 주인공 딜런이 뉴욕의 헤드헌터 제이미를 만나게 되는 건 패션지 'GQ(지큐)'의 아트디렉터 일을 제안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각자의 애인과 헤어져 심리적 공황 상태다. "조지 클루니처럼 일하고 섹스할 거야!"라는 말을 동시에 내뱉는 걸 보면 상태가 꽤 심각하다. 그들은 이별의 고통은 최소화하고 외로운 몸은 달래줄 방법을 찾다가 '아이패드'의 성경 앱에 손을 올려놓고 서약을 한다. "어떤 연애도, 감정도 없이, 서로 원할 때 섹스만 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들의 사랑이 맨해튼에서 펼쳐지고, 딜런이 '지큐'의 아트디렉터인 건, 이런 신종 관계를 가장 많이 언급하는 곳이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보다가 '지큐'에서 여자가 묻고 남자가 대답하는 형식의 섹스 칼럼을 함께 진행하던 한 선배의 실제 에피소드 하나를 떠올렸다. 원고 마감이 다가오자 편집장이 소릴 지르며 했다는 말이었다. "야! 너희, 왜 섹스 안 해. 어디 도망갈 생각 말고, 당장 이 자리에서 해!" 이틀 밤낮을 함께 새운 남녀가 퀭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의 성감대에 대해 묻는다. '쓰다'는 동사를 '하다'로 바꾸면 이렇게 이상야릇한 말이 된다.

 영화 '프렌즈 위드 베네핏' 포스터
사실 이 영화는 '예상했다시피' 해피엔딩이다. 말인즉, '프렌즈 위드 베네핏'이라는 신조어에 걸맞은 새로운 관계 모색이 할리우드엔 없단 뜻이다. 다만 남자와 여자가 마지막에 키스하기 전, 남자가 무릎을 꿇으며 하는 말이 "나와 결혼해줘!"가 아니라 "나랑 계속 친구 해줘!"라는 건 다행스러웠다. 사실 파격적인 관계 모색이 가능하려면 '도덕적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 앞에 다가서야 한다. 하지만 사랑의 계보학을 따라 올라가 보면 애초에 '사랑'이란 불합리하고 병적인 상태를 일컫는 말이었고, 심지어 중세 프랑스에선 그런 사랑을 '성욕'이라 바꿔 불렀다. 그것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전통적 결혼'을 유지하고, 생산의 입장에서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사실 전통적 결혼의 밑바탕은 '사랑'이 아닌 철저한 '거래'였다. 여자는 남자 집안의 외교 특사처럼 파견되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옛날의 사랑이 무조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얘길 해준다.

남자와 여자의 우정은 가능한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성욕이 사라지고 나면 침대는 주말 공원의 나무 벤치처럼 바뀐다는 말이다. 우정은 그제야 싹튼다. 나는 이미 잘 만큼 자고, 너덜너덜해진 연애를 겪은 헤어진 남자와 여자 사이엔 우정 비슷한 것이 가능할지 모른단 이론을 조심스레 타진해 보겠다. 정답은 아니다. 관계에서 정답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정말 그렇다. 

●프렌즈 위드 베네핏- 
저스틴 팀버레이크, 밀라 쿠니스, 에마 스톤, 우디 해럴슨 주연의 영화로 ‘윌 글럭’이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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