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4일 화요일

공항에서 일주일을


p.109
모든 능숙한 작가들은 경험 가운데도 주목할 만한 측면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들이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그 소소한 것들은 우리 감각을 계속 뒤덮는 다량의 자료 속에 파묻혀 사라질 것이다. 작가들은 우리 주위의 세계에서 그런 것들을  찾아내고 음미하라고 촉구한다.

p.113
Bestelle dein Haus,
Denn du wirst Sterben,
Und nicht lebendig bleiben.
네 집을 단정하게 정돈해라,
네가 죽을 날,
이제 살아 있지 않을 날에 대비해서.

p.118
형 이상학적 문제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그런 분위기에서 끝내는 것이 아쉬운 느낌이 들어, 나는 두 성직자에게 여행자가 비행기에 타서 이륙하기 전 마지막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생산적일 것 같으냐고 물어보았다. 목사는 그 점에서 확고했다. 그는 그때 해야 할 일은 열심히 하느님 쪽으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을 수 없으면 어쩌죠?" 내가 물고 늘어졌다.
목사는 입을 다물더니 그런 것을 목사에게 묻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조금 자유주의적인 신학에 기대고 있는 젊은 동료가 간결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래도 더 포괄적인 답을 해주었다. 나는 그 이후로 며칠 동안 활주로로 나오는 비행기를 지켜볼 때마다 그 말을 다시 생각해보곤 했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우리가 마음속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삶의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주는 거죠."

p.123
"이 세상의 노고와 소란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부, 권력, 탁월한 위치를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에서 그렇게 묻고 스스로 대답을 했다.
"공감하고, 만족하며,  찬동하면서 관찰하고,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대상이 되기 위해서이다."

"모든 문화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기도 하다."
by. 문학평론가 발터 벤야민

p.149
시인을 인세 보고서로 판단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항공사를 손익 계산서에 따라 평가하는 것도 부당해 보였다. 주식시장은 매일 세계 여러 항공사의 깃발 아래에서 일어나는 아름답고 흥미로운 수많은 순간에 절대 정확한 가격을 매길 수 없다. 공중에서 보는 노바스코샤의 광경을 묘사할 수도 없고, 홍콩 매표소에서 직원들이 누리는 동지애를 포착할 수도 없으며, 이륙할 때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흥분을 계량할 수도 없다.

p.173-175
과거에는 도착하는 때라는 것이 있었다. 풍경이 조금씩 바뀌면 그에 맞추어 마음도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사막은 점차 키 작은 나무들에 길을 내주고, 긴 풀이 덮인 땅은 짧은 풀이 빽빽한 초원에 길을 내주었다. 이윽고 항구에 도착해 낙타에서 짐을 내리고, 세관을 굽어보는 방을 얻고, 기선을 타고 항해에 나섰다. 날치들이 배의 선체를 스치며 지나갔다. 승무원들은 카드놀이를 했다. 공기는 서늘해졌다.
그러나 요즘 여행자는 화요일에는 아부자에 있다가 수요일에는 히드로의 새 터미널의 보조 비행장 끝에 있을 수도 있다. 어제 점심에는 아프리카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우세 지구에서 튀긴 바나나를 먹었지만, 오늘 아침 8시에는 히드로에 와 있다. 기장은 코스타 커피 체인 옆의 게이트에서 777기의 쌍발 엔진을 끈다.
피로에도 불구하고 감각은 완전히 깨어나 모든 것을 흡수한다. 빛, 도로 표지, 바닥 광택, 피부색, 쇳소리, 광고. 마약을 한 상태이거나, 갓난아기 또는 톨스토이가 된 것처럼 감각이 날카롭다. 갑자기 고향이 다른 어디보다 낯설게 느껴진다. 이제까지 돌아다녔던 다른땅에 의해서 세세한 모든 것들이 상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오부두 언덕의 새벽에 대한 기억에 비추어보면 이 아침 빛은 얼마나 색다른지. 하이 아틀라스 산맥의 바람을 맞고 온 뒤에 이 녹음된 안내 방송은 얼마나 특별하게 들리는지. 루사카 거리 장터의 소음이 귀에 쟁쟁한 상태에서 두 여자 지상 근무원의 수다는 얼마나 불가해하게 영국적으로 들리는지(두 사람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이런 수정처럼 맑은 관점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른 현실, 튀니스나 하이데라바드에 존재하는 현실에 관해 알고 있는 것과 고향이 늘 균형을 이루게 하고 싶다. 여기 있는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으며, 비스바덴이나 뤄양의 거리는 다르고, 고향은 많은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

p.186-189
5. 그러나 수하물 찾는 곳은 공항의 감정적 클라이맥스의 서막일 뿐이다. 아무리 외롭고 고립된 사람이라도, 아무리 인류에게 비관적인 사람이라도, 월급을 줄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도, 도착했을 때 누군가 의미 있는 사람이 맞으러 나와주기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일을 하느라 바빠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해도, 우리가 애초에 여행을 떠난 것에 불만이 있어 보기도 싫다는 말을 했다고 해도, 지난 6월에 우리 곁을 떠났거나 12년 반 전에 죽었다고 해도, 그래도 그들이 나와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냥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고(우리가 작은 아이였을 때 누군가 가끔이라도 그렇게 해주었을 것이며, 그런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 여기까지 올 힘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와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몸을 떨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도착 라운지로 나아가면서 얼굴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세계의 익명의 공간들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우리가 보통 취하는 엄숙하게 경계하는 태도를 곧바로 버리는 것은 무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희미한 미소를 지을 여지는 남겨두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사가 농담을 할 때 웃어야 할 대목이 언제 나오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보통 짓는 명랑하면서도 모호한 표정으로 타협을 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p.191-192
현대 사회에 널리 퍼진 이혼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공항에서 재결합하는 모습은 끊임없이 눈에 띈다. 이런 맥락에서 냉정하거나 금욕적인 척하는 것은 이제 소용없다. 지금은 연약하지만 통통한 어깨를 꼭 끌어안고 무너지며 눈물을 뿌릴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 생활에서는 힘과 강인함을 투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지독하게 연약하고 위태로운 피조물들이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을 습관적으로 무시하고 또 그들 역시 우리를 무시하지만, 늘 우리의 행복의 가능성을 볼모로 잡고 있는 소수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냄새만으로도 인식할 수 있으며, 그들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할 것이다. 초조하게 텅 빈 표정으로 어슬렁 거리는 남자들이 있다. 반 년 동안 이 순간을 고대해온 남자들이다. 자신의 눈을 빼다 박은 듯 잿빛이 감도는 녹색 눈에 할머니의 뺨을 물려받은 작은 소년이 공항 직원의 손을 잡고 스테인리스스틸 문 뒤에서 나타나자 그들은 더 자제를 하지 못한다.

p.192-193 (윗 문단과 이어서)
그런 순간이면 죽음을 피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죽음을 영원히 계속 속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도 공존하며, 그 때문에 이 장면이 더욱 가슴 아리다. 어쩌면 이것도 죽을 운명에 대비해 연습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인지 모른다.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자식은 일상적인 출장을 떠나기 전에 늘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이며, 그러다 집행유예는 어느 순간 끝이 날 것이다. 한밤중에 멜버른의 한 호텔의 20층에 있는 방으로 전화가 걸려와, 세계 반대편에서 아버지가 치명적인 발작을 일으켰으며, 의사들은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날 이후 이제 어른이 된 소년은 도착 라운지에 늘어선 사람들 속에서 늘 빠져 있는 얼굴 하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p.199-201
종종 삶이 우리가 가는 길에, 그것도 우리의 가장 강렬하고 진심 어린 만남이 이루어지는 몇몇 현장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남녀 관계에 가장 큰 장애로 꼽히는 것을 가져다놓는 것을 보면 묘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결국은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이들은 이제 돈을 내고 몇 층짜리 주차장에서 길을 잃지 않고 빠져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차장의 가차 없는 형광등 불빛 밑에서 시민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애초에 여행을 떠났던 이유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말려들곤 하던 천박하고 성난 분위기에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아니었던가.
주차장이라는 아주 가혹한 배경 - 타이어 자국과 기름 얼룩으로 훼손된 콘크리트 바닥, 버려진 카트가 어지럽게 놓여 있는 주차 구획, 쾅 닫히는 문과 가속을 하는 차량들이 내는 자기주장 강한 소리들이 메아리치는 천장 - 은 최악의 가능성으로 다시 미끄러져 돌아가는 것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촉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찾아갔던 여행지들에 부탁할 수도 있다. "내가 더 관대해지고, 덜 두려워하고, 늘 호기심을 느끼도록 도와줘. 나와 내 혼란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해줘. 나와 내 수치감 사이에 대서양 전체를 넣어줘." 지혜로운 여행사라면 우리에게 그냥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어보기보다는 우리 삶에서 무엇을 바꾸고 싶으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텐데.

p.205
여행자들은 곧 여행을 잊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의 대륙을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할 것이다. 배우자나 자식과 다시 말다툼을 시작할 것이다. 영국의 풍경을 보며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매미를 잊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보낸 마지막 날 함께 품었던 희망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두브로브니크와 프라하에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해변과 중세의 거리가 주는 힘을 다시 순수한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내년에는 어딘가에 별장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또 해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아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를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 무료 저녁 뷔페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p.213
옮기고 나서
실제로 공항은 여행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기도 하고, 각 사람의 지위와 그에 따른 불안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며, 현대 건축의 백미이기도 하고, 일의 기쁨과 슬픔이 녹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화성인이 온다면 구경시켜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장소로 공항을 꼽는다는 저자의 말은 전혀 농담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항은 저자의 생각과 감정을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2012년 7월 19일 목요일

이 시대, 두 이데올로기 그리고 삶

"우리는 산책할 수 있는 도시의 거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도시의 거리가 갖는 이데올로기는 우리로 하여금 걷지 말고 자동차 산업의 이익에 편승할 것을 강제한다. 모든 거리와 도로는 이미 자동차를 위해 있다. 사람들은 한 정거장의 시내버스 구간도 걷기를 꺼려한다. 사람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이 도시에는 이미 걷는 자를 위한 공간의 배려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성호의 책 '반하는 건축' 중


"'떠난다'는 일은 쉽지 않다. 떠나는 방법은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다. 수없이 떠나본 사람에게도 모든 떠남은 항상 최초의 경험이다. 그러나 떠나면서도 떠나지 않는 자들의 시대가 오기 시작했다. 관광의 시대, 저마다 은밀한 영혼 속에서 충격과 혁명을 불러일으켜야 할 것들이 집단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여행자는 멸종되어 가고 그 자리에 관광객 떼가 지불한 회비의 권리를 행사한다."
-김화영의 책 '행복의 충격' 중

두려움

  내일이란 말을 들으면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먼저 내일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하면서 우리에게 설렘의 감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일은 지금보다 더 끔찍한 삶을 예견케 하면서 두려움의 감정을 심어주기도 한다. 아마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의 인생이 끔찍한 삶의 연속이었다면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보다 더 나쁠 수는 없어!"라고 외칠 수는 있겠지만 "지금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느낌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첫사랑에 실패했던 사람이 항상 새롭게 찾아온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두려움Metus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에티카Ethica

  과거의 불행이 집요하게도 미래에 다시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 생기는 슬픔,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그렇다. 불행한 과거는 과거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잿빛 어두움을 던지기 십상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들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전체 3막으로 펼쳐지는 헨리크 입센의 '유령'은 바로 이런 잿빛 미래, 그리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묘사한 희곡이다.
  여기서 불행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은 알빙 부인이다. 기독교적 삶을 내면화한 알빙 부인은 젊은 시절 남편의 외도를 통해 너무나 커다란 상처를 받고도 묵묵히 참아온 여인이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 오스왈드를 어릴 적부터 외국으로 보내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남편의 자유분방함이 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가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오스왈드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알빙 부인은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들 오스왈드에게서 남편의 기질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령, 아까도 레지네와 오스왈드가 저쪽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 소리를 듣고 저는 마치 유령을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우리는 모두 유령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선생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이에요.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것이 귀신에 씐 것처럼 우리들에게 씌어 있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모든 종류의 소멸된 낡은 사상이나 여러 가지 소멸된 낡은 신앙 따위도 우리에게 씌어 있어요. 그런 것이 우리의 내부에 실제로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거기에 달라붙어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쫓아낼 수가 없거든요. 잠깐 신문을 집어 들어도 그 행간에 유령이 잠입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틀림없이 온 나라 안에 유령이 있는 겁니다.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은 거에요. 게다가 우리는 모두 햇빛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어요."

  오스왈드가 레지내와 시시덕거리는 것을 목격한 날, 알빙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레지내가 누구인가.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저주받은 아이 아니던가. 그러니 어떻게 그녀가 자신의 멘토였던 만데르스 목사에게 이런 두려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결국 알빙 부인에게 유령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어떤 인간의 특징들이 실체화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자유에 대한 동경, 그리고 사랑에 대한 열정 등이다. 한마디로 말해 기독교적 가치에 어긋나는 모든 것이 유령으로 실체화되면서 그녀에게 두려움이 생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유령은 어쩌면 기독교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던 알빙 부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가 유령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와 서서히 잿빛으로 시들어가 미치게 되는 사람은 오스왈드였으니까.
  오스왈드가 힘없이 읊조리는 마지막 대사가 서글프지 않은가. "태양... 태양..."이라고 우물거리면서. 오스왈드는 기독교적 가치의 어두움을 날려버릴 태양을 절망스럽게 찾고 있었으니.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6> 두려움 혹은 과거가 불행한 자의 서글픈 감정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폭풍우나 안개, 눈 때문에 힘들 때도 있을 거야. 그런 때는 자네보다 먼저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을 떠올려 봐.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 '남들이 해낸 일은 나도 꼭 할 수 있다'고."

"한 직업의 위대함이란 어쩌면 사람들을 이어주는 데 있을지 모른다. 진정한 의미의 부(富)란 하나뿐이고,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라는 부니까. 우리는 오직 물질적인 부를 위해 일함으로써 스스로 감옥을 짓는다. 우리는 타버린 재나 다름없는 돈으로 우리 자신을 고독하게 가둔다. 삶의 가치가 깃든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살 수 없는 그 돈으로."

  '인간의 대지Wind, Sand and Stars'는 바로 이 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전해준다. 세 대의 비행기가 연속해 불시착했던 그날 밤,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추억을 이야기하고 농담을 나누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한없이 가난했다. 바람, 모래, 그리고 별. 그럼에도 어두침침한 그 식탁보 위에서 추억말고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예닐곱 명의 사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리비아 사막에 추락한 그는 깨닫는다. 조난자는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난당한 이들은 바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그는 조난자들을 향해 달려 가야 한다고.

"만약 내가 이 세상에 혼자였다면 나는 그냥 뻗어버렸을 거야."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데 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가족과 동료들에 대한 책임, 그리하여 마침내 가족과 동료들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 힘들었던 기억이 펼쳐주는 마술 같은 맛을 만끽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자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받아들이는 데 있다. 진리는 이처럼 역설적이다.

"우리 외부에 있는 공동의 목적에 의해 형제들과 이어질 때, 오직 그때만 우리는 숨을 쉴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임을. 동료란 도달해야 할 같은 정상을 향해 한 줄에 묶여있을 때만 동료다."

  그는 프랑스에서 폴란드로 돌아가는 열차 3등칸, 더러움으로 진흙덩어리가 돼버린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황금사과같은 어린아이를 발견한다.
"여기에 음악가의 얼굴이 있구나. 여기에 어린 모차르트가 있구나. 여기에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이 있구나. 보호받고 사랑받고 잘 교육받기만 한다면 그 아이가 무엇인들 되지 못하겠는가!"
  그러면서 그는 죽어가는 모차르트를 괴로워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비참함 속에서 그저 잠든 채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직 정신만이 진흙에 숨결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고립된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 모두는 같은 나무에 난 가지들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서로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인간으로 알아주는 상대 앞에서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


Love does not consist in gazing at each other 
but in looking outward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

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



중앙일보 S 매거진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16> '인간의 대지'와 생텍쥐페리

경탄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누군가 나의 삶에 핑크빛 가득 찬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을 꿈꾸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닌가. 평범하고 심지어는 권태롭기까지 했던 잿빛 삶이 핑크빛을 띠게 되는 기적을 그 누가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기적과도 같은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 여신 혹은 신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 혹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결코 나에게 찾아오리라 기대할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 혹은 그녀의 고귀함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 없을 정도로 열등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처럼 사랑은 경탄과 함께 시작되고, 경탄과 함께 유지되는 법이다. 결국 애인에 대한 경탄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이미 덧없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랑을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 프랑스 소설가 에릭 오르세나가 자신의 소설 '오래오래Longtemps'에서 파고들었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소설은 40년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는 두 사람, 그러니까 엘리자베트라는 여자와 가브리엘이란 남자 사이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기묘할 정도로 오래 지속된 두 남녀 사이의 불륜을 다루고 있다.
  보통 불륜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일시적인 감정에서 시작되는데 성적인 관계가 반복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지기 쉽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불륜은 오묘한 구석이 있다. 정상적인 애인 관계나 부부 관계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오래' 지속되니까 말이다. 사랑에 빠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브리엘이 엘리자베트에게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바로 '경탄'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자.

"그녀의 검은 눈에서 금빛 광채가 반짝거렸다. 희로애락의 그 어떤 감정으로도 결코 꺼뜨리지 못할 장난기였다. 가브리엘은 전율을 느꼈다. 그는 여자를 잘 몰랐다. 아내가 있긴 하지만,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요컨대 가브리엘은 40년을 살도록 아직 이렇게 장난기 가득한 여왕 스타일은 만나본 적이 없다."

  가브리엘의 감정을 더 면밀히 음미하려면 스피노자의 도움을 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경탄Admiratio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 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에티카Ethica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가브리엘에게 엘리자베트는 이런 압도적인 폭포처럼 경탄을 자아내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40년을 살도록 아직 이렇게 장난기 가득한 여왕 스타일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묘사한다. 압도적 위엄을 가진 여왕처럼 느껴지는 여자, 자신을 하염없이 평범하게 만드는 여자, 당연히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는 여자... 엘리자베트는 가브리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앉은 태양"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는 엘리자베트가 오르세나의 대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의 입을 빌려 오르세나는 사랑의 비밀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혼외의 사랑은 결혼 생활과 달라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죠. 끊임없이 온갖 것을 파악해 범상함을 초월해야 해요. 아니면 차츰차츰 너절한 타성에 빠져들어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거예요."

  엘리자베트의 말처럼 관계가 "범상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너절한 타성에 빠져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경탄의 존재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애인이나 부부 관계보다 불륜이 사랑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한 조건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상적이라고 인정된 남녀 관계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범상함을 초월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경탄의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랑은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한 마디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가브리엘에게 엘리자베트는 이런 압도적인 폭포처럼 경탄을 자아내는 존재였던 것이다."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5> 경탄, 혹은 사랑이란 감정의 바로미터

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치욕

치욕Pudor은 우리가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치욕은 타인이 자신의 어떤 행동을 비난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내면에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타인이 비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이 비난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욕망은 허영일 수도 있고, 혹은 덧없는 인간의 자존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허영과 자존심이 좌절됐을 때 인간은 치욕감에 몸을 떨게 된다. 치욕을 푸는 길은 그것을 가져다준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밖에 없다.

이기적 유전자

We are survival machines-robot vehicles blindly programmed to preserve the selfish molecules known as genes.
Richard Dawkins(1941~ ), 'The Selfish Gene'



  40억 년 전 스스로 복제하는 힘을 갖게 된 분자가 원시 대양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자기 복제자는 더 잘 살아남기 위해 운반자까지 만들었다. 자기가 사는 생존 기계를 스스로 축조한 것이다. 생존 기계는 더 커지고 정교해졌다. 개량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흐른 지금 자기 복제자는 외부로부터 차단된 로봇 속에 안전하게 거대한 집단으로 떼 지어 살면서, 복잡한 간접 경로를 통해 외계와 연락하고 원격 조정기로 외계를 조작하고 있다.
"이것들은 당신 안에도 내 안에도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유지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자기 복제자는 기나긴 길을 지나 여기까지 걸어왔다. 이제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다."
  여기서 '우리'란 인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모든 동식물과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포함한다. 유전자는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한 종류의 분자며, 불멸의 존재다. 즉 유전자는 몸이 노쇠하거나 죽기 전에 그들의 몸을 차례로 포기해 버림으로써 세대를 거치면서 몸에서 몸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중앙일보 S 매거진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14> '이기적 유전자'와 리처드 도킨스 중






명예욕

  명예만을 추구하던 남편이 과연 이제야 테레즈의 내면과 직면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 처음으로 남편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렇게 덧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순간, 테레즈는 이제 정말로 완전히 남편을 포기해 버린다.
"나는 솔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요. 내가 당신에게 하는 이야기는 왜 다 거짓처럼 들리는 걸가요?"
"목소리 낮춰요. 우리 앞에 있는 신사가 뒤돌아보잖소."
  베르나르는 이 순간을 끝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테레즈 역시 이 남자가 한순간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다시 영원히 멀어져 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케루(Therese Desqueyroux)'

  단지 사람들의 기분에 들기 위한 이유에서만 어떤 것을 행하거나 피하려는 노력, 이런 노력을 명예욕Ambitio이라고 말한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제3자의 시선만 의식하게 마련이다. 결국 베르나르와 같은 사람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에 몰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현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둘의 관계"라고 말이다.
  나와 너를 제외하는 일체 모든 것이 배경으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제3자의 시선만 의식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에 몰입한다는 게 가능할까. 나와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 배경으로 물러가지 않는 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3> 명예욕, 혹은 사랑하는 이를 절망시키는 감정 中

터키의 민속춤


  • 제이베크(Zeybek) 터키 서부에서 전해진다. 남자들만 추는 춤으로 원형으로 서 있다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팔은 어깨 높이로 올리는 동작으로 이뤄진다.
  • 호론(Horon) 흑해 연안의 춤. 물 밖에 나온 물고기가 몸을 떨듯 춤춘다.
  • 할라이(Halay) 중앙 아나톨리아의 춤으로 반원형으로 서서 서로의 손이나 어깨를 잡고 스텝과 방향을 조절하며 춘다.
  • 차이다 츠라(Cayda cira) 여자들끼리만 촛불을 들고 추는 서부의 민속춤. 보통 결혼식 전날 밤 신부의 집에서 춘다.

소심함

  소심함timor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스피노자에게 선과 악은 우리와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활력을 주는 것이 선이고, 슬픔과 우울함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악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실내복 차림으로 경쾌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몽을 떠올리고는 그를 원래의 그 자신에게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를 영원히 보내버림으로써 잠시 슬픔에 잠기게 했다가, 예상컨대 앞으로 다가올 훨씬 멋진 수많은 아가씨들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그에게 인생이라는 걸 가르치는 데에는 시간이 자신보다 더 유능하겠지만, 그러려면 훨씬 오래 걸리리라. 그녀의 손 안에 놓인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키스했다."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중

  폴의 눈, 서른아홉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약간 주름 잡힌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연신 흐른다. 그녀는 한때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젊은 청년 시몽과의 사랑을 접으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며 자신의 삶을 장밋빛으로 물들여주었던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두 명의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폴은 지금 자신의 삶에 빛을 안겨 주었던 시몽을 떠나 6년 동안 사귀었던 바람둥이 로제에게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시몽에게 빠져 있다는 걸 견디기 힘들어하는 로제지만 시몽을 버리고 그에게 돌아가는 순간 그는 다시 자신을 외로움에 방치하리라는 사실을.
  그렇지만 폴은 두려운 것이다. 시몽은 너무나 젊지만 자신은 점점 더 늙어 갈 것이고, 언젠가 시몽은 자신에게서 어떤 매력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 로제는 지금처럼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자신을 외롭게해도 자기 곁에 가구처럼 있을 것이다.
  그렇다. 폴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미래다. 영원히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삶을 떠나 시몽을 선택하면 잠시 행복하겠지만 머지않아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로제를 선택하면 지금은 불행할 수 있지만 버려질 위험은 별로 없다. 그녀는 사랑의 위험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소심했던 것이다. 불안한 사랑보다는 불행한 안정에 손을 들어준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시몽과의 이별을 결정하면서 폴의 눈에서 흘렸던 눈물의 의미다.
  만일 자신의 결정이 행복을 선택한 것이었다면 폴의 눈물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결정이 소심함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사랑 앞에서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이 몸서리쳐지게 싫었을 것이다. 홀로 버려질 수도 있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에 현재 만끽할 수도 있는 사랑을 포기하는 자신이 너무 불쌍했던 것 아닐까? 그러니 폴도 이렇게 느꼈던 것이다. "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고 말이다. 마치 시몽의 미래를 위해 헤어지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사랑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사강이 폴의 슬픈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하려고 했던 말은 사랑이란 용기 있는 자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진실 아니었을까? 50대 나이에 마약 복용 혐의로 법정에 섰을 대 사강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자기 파괴의 위험을 감당하며 사랑의 모험에 과감히 뛰어들지 않으면 순간적으로는 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편리한 안일함은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고 무겁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결국 아주 천천히 우리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파괴돼 갈 것이다. 그래서 사강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타자로의 맹목적인 비약에 어떻게 위험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의 삶과 단절해 마치 천 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을 건너뛰려는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랑의 꿀맛을 맛볼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2> 소심함, 혹은 작은 惡을 선택하는 비극 중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의 삶은 그가 남긴 경구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최악의 결과는 항상 최선의 의도로 시작된다."
"하나의 인생 이상을 살았던 사람은 죽음도 두 번 맞아야 한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뉴욕 공항 세관 직원과의 일화
"신고할 것 없습니까?"
"나의 천재적인 재능 외에는 신고할 것이 없소."

그를 잘 이해하려면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를 읽어야 한다. 서문에는,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 썼든지, 잘못 썼든지 둘 중 하나다. 단지 그뿐이다."

주인공 도리언은 ...
"아! 어쩌다가 초상화가 인생의 짐을 대신 져주고, 자신은 영원한 청춘의 때묻지 않은 광채를 계속 간직하게 해달라며 기도하는, 그 오만하고 격정적인 소름끼치는 순간을 맞게 되었던가! 모든 실패는 거기서 비롯되었다. 인생에서 죄를 범할 때마다 확실하고 즉각적인 처벌을 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처벌은 정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의로운 신에 대한 인간의 기도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가 아니라 '우리의 불의를 벌하여 주시옵고'라야 했다."

작품 속에서 도리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탐미주의자 헨리 워튼 경의 말처럼, 노년의 비극이란 사람이 늙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젊어서 생기는 것이다.
"아! 젊은 시절에 그 젊음을 만끽하시오. 따분한 것들에 귀 기울이느라 황금 같은 시절을 허비하지 말아요. 당신의 인생을 어리석고 흔해빠진 저속한 것들에 내줘서는 안 되오. 삶을 살아 가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멋진 삶을 살아요!
Ah! realize your youth while you have it. Don't squander the gold of your days, listening to the tedious."


중앙일보 S 매거진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12>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오스카 와일드

복수심

복수심Vindicta은 미움의 정서로 우리들에게 해악을 가한 사람에게 똑같은 미움으로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에티카(Ethica), 스피노자

cf.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사랑, 실체를 갖게 되면서...



  '사랑'이란 건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의 추억들은 현실과 실체를 가진다. 우리는 이유 없이 첫사랑의 '통통한 손목'이나 '쪼글쪼글한 팔꿈치'를 보며 설렜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을 '꾀어내' 다른 곳도 아닌 '단대 호수'를 걷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사랑이 지난 뒤에도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밤바다'를 보면서 그 바다의 '바람에 걸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있어/ 네게 전해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는 사랑에 실체가 있고 사랑을 나누었던 여수라는 살아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비로소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꽃을 찾아 다녔고, 설레는 마음으로 연인의 손목을 잡고 꽃비가 내리는 거리를 걷고 싶었고, 어색하지만 그 연인을 '그대'라고 부르고 싶었던 것, 그리고 그와 함께 가고 싶었던 물리적인 공간이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런 사랑의 감정은 .. 극단적인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랑보다 느슨하지만 훨씬 현실에 구체적으로 근거한다.


중앙일보 S 매거진
이윤정 대중문화 칼럼니스트의 '우리가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 새삼 일깨우다: 버스커 버스커가 인기 있는 이유' 중

경쟁심

  경쟁심이란 타인이 어떤 사물에 대해 욕망을 가진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그렇지만 여기서의 타인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좋아하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을 똑같이 욕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이것은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욕망하는 것을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가 상큼한 단발머리를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긴 머리를 자를 것이다. 그가 브람스를 좋아한다면 내 MP3에서 브람스가 흘러나올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0> 경쟁심, 혹은 사랑의 슬픈 변주곡 中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오웰은 스페인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감출 수 없는 진실과 불의를 고발하기 위해 책을 쓴다.

"나는 당시 영국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한 가지 사실, 무고한 사람들이 엉뚱하게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그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썼다."

입대하기 전날 이탈리아인 의용병과 마주친 오웰,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이 언어와 관습의 간극을 뛰어넘어 순간적으로 완전히 밀착된 것 같았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그도 나를 좋아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대한 첫인상을 유지하려면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1월의 추운 새벽 꽁꽁 언 몸으로 경계근무를 설 때,
"이따금 우리 뒤편 봉우리들 뒤로 동이 트면서 가느다란 황금색 빛줄기들이 검처럼 어둠을 가르고, 이어서 빛이 밝아지면서 가없이 펼쳐진 구름바다가 붉게 물들 때, 그 광경은 설사 밤을 꼬박 새우고 난 뒤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앞으로 세 시간은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질 때라도, 한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짧은 전쟁 기간동안 인생의 나머지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일출을 보았다."

오웰의 마무리,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에 화들짝 놀라기 전까지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 책이 나온 지 1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영국은 울면서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중앙일보 S 매거진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10> '카탈로니아 찬가'와 조지 오웰 中

치욕 또는 수치

  치욕Pudor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Verecundia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치욕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는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을 멀리할 수 있게 된다. 수치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을 짓을 애초에 하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은 비난받을 짓을 애초에 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강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과 감정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게이브리얼이 아내와 둘만의 은밀한 생활에 대한 추억으로 충만해 있었을 때, 다시 말해 온화함과 기쁨과 욕망으로 충만해 있었을 때 그녀는 마음 속으로 그를 다른 남자와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존재가 수치스럽다는 의식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늙은 이모들을 위해 심부름꾼 노릇이나 하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속물들에게 연설이나 해대고 자기 자신의 어리석기 그지없는 욕정을 미사여구로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소심하면서도 마음씨만은 호인인 감상주의자로, 조금 전에 거울에서 얼핏 보았던 그 애처롭고 얼빠진 녀석으로 보였다. ... (중략) 그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아내가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던 그 연인의 두 눈의 모습을 어쩌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가슴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게이브리얼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그는 여태까지 어떤 여인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감정을 몸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생전 처음으로 느껴 보는 그러한 감정이 분명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두 눈에는 더욱 흥건하게 눈물이 괴었다."
-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의 단편 '죽은 이들(The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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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 수업 <9> 치욕 또는 수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