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9일 목요일

경탄

  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누군가 나의 삶에 핑크빛 가득 찬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을 꿈꾸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닌가. 평범하고 심지어는 권태롭기까지 했던 잿빛 삶이 핑크빛을 띠게 되는 기적을 그 누가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기적과도 같은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 여신 혹은 신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 혹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결코 나에게 찾아오리라 기대할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 혹은 그녀의 고귀함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 없을 정도로 열등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처럼 사랑은 경탄과 함께 시작되고, 경탄과 함께 유지되는 법이다. 결국 애인에 대한 경탄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이미 덧없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랑을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 프랑스 소설가 에릭 오르세나가 자신의 소설 '오래오래Longtemps'에서 파고들었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소설은 40년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는 두 사람, 그러니까 엘리자베트라는 여자와 가브리엘이란 남자 사이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기묘할 정도로 오래 지속된 두 남녀 사이의 불륜을 다루고 있다.
  보통 불륜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일시적인 감정에서 시작되는데 성적인 관계가 반복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지기 쉽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불륜은 오묘한 구석이 있다. 정상적인 애인 관계나 부부 관계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오래' 지속되니까 말이다. 사랑에 빠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브리엘이 엘리자베트에게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바로 '경탄'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자.

"그녀의 검은 눈에서 금빛 광채가 반짝거렸다. 희로애락의 그 어떤 감정으로도 결코 꺼뜨리지 못할 장난기였다. 가브리엘은 전율을 느꼈다. 그는 여자를 잘 몰랐다. 아내가 있긴 하지만,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요컨대 가브리엘은 40년을 살도록 아직 이렇게 장난기 가득한 여왕 스타일은 만나본 적이 없다."

  가브리엘의 감정을 더 면밀히 음미하려면 스피노자의 도움을 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경탄Admiratio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 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에티카Ethica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가브리엘에게 엘리자베트는 이런 압도적인 폭포처럼 경탄을 자아내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40년을 살도록 아직 이렇게 장난기 가득한 여왕 스타일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묘사한다. 압도적 위엄을 가진 여왕처럼 느껴지는 여자, 자신을 하염없이 평범하게 만드는 여자, 당연히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는 여자... 엘리자베트는 가브리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앉은 태양"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는 엘리자베트가 오르세나의 대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의 입을 빌려 오르세나는 사랑의 비밀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혼외의 사랑은 결혼 생활과 달라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죠. 끊임없이 온갖 것을 파악해 범상함을 초월해야 해요. 아니면 차츰차츰 너절한 타성에 빠져들어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거예요."

  엘리자베트의 말처럼 관계가 "범상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너절한 타성에 빠져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경탄의 존재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애인이나 부부 관계보다 불륜이 사랑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한 조건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상적이라고 인정된 남녀 관계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범상함을 초월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경탄의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랑은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한 마디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가브리엘에게 엘리자베트는 이런 압도적인 폭포처럼 경탄을 자아내는 존재였던 것이다."


중앙일보 S 매거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5> 경탄, 혹은 사랑이란 감정의 바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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