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꾸는 체인지 메이커] 피 한 방울로 의료 산업 새 길 … 여성 스티브 잡스
입력 2014-10-26 오전 2:49:11
수정 2014-10-26 오전 2:50:16
수정 2014-10-26 오전 2:50:16
테라노스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스가 혈액을 담는 유리관을 들어 보이고 있다. 기존 혈액 검사 시 사용되는 유리관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다. [사진 테라노스] |
사회자에 따르면 테라노스는 피 한 방울로 최대 200여 가지의 의학 검사를 매우 쉽고 빠르고 저렴하게 할 수 있는 획기적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었다. 실제 이 회사의 연구원이 무대에 등장해 사회자의 피를 채취했다. 아주 작은 전자 침으로 손가락을 살짝 찌른 것이 다였다. 혈액은 채취와 동시에 퓨즈처럼 생긴 0.5인치 높이의 초소형 유리관(Nanotainer)에 들어갔다. 그 정도 양으로 70회 이상의 혈액 검사를 할 수 있었다. 기존 방식대로라면 약 4인치 높이 유리관 여러 개를 채울 만큼의 피를 뽑아야 할 일이었다. 사회자는 침을 찌르는 줄도 몰랐다며 신기해했다. 더 놀라운 건 가격이었다. 일반적 검사비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검사 시간 또한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홈스는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로 “이 서비스를 통해 미국 공공 의료보험은 10년간 2000억 달러 이상을 절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알게 된 테라노스의 기업가치는 무려 90억 달러(약 9조5000억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2, 3주 뒤 홈스가 각국 매스컴을 타는 일이 생겼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 400대 부호 순위에서 자산가치 45억 달러로 110위를 기록한 것이다. 테라노스 지분의 50% 이상을 보유한 덕이었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녀는 ‘세계 최연소 자수성가 여성 억만장자’였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왜 1, 2년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의 주목을 받지 못한 걸까. 홈스가 테크 크런치 무대에서 밝혔듯 철저한 비밀주의 때문이었다. 이른바 ‘스텔스 모드(stealth mode)’였다. 홈스는 19세이던 2003년 테라노스를 창업했다. 이후 10년 가까이를 극소수 전문가·투자자들과만 접촉하며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가 세계 의료산업 판도는 물론 인류 건강에 큰 영향을 끼칠 검사법 개발과 시스템 구축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테라노스는 지난해 9월 홈스의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를 기점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홈스 이야기를 상세히 다룬 포춘, USA투데이, 와이어드, 포브스, 샌프란시스코비즈니스타임스 등의 기사를 찾아 읽었다. 거기엔 강력한 목적의식과 불굴의 신념, 탁월한 지적 역량과 카리스마를 지닌 ‘천생 창업자(natural-born entrepreneur)’가 있었다. 흡사 ‘여성 스티브 잡스’를 보는 듯했다. 실제 홈스는 집무실에 암 투병 당시의 잡스 사진을 걸어뒀다고 한다. 차이라면 홈스의 리더십이 훨씬 부드럽고 포용력 또한 뛰어나다는 것. 이는 성장과정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을 듯싶었다.
다른 많은 성공적 창업자들과 마찬가지로 홈스도 10대 시절에 첫 사업을 시작했다. 미국 정부기관 소속으로 제3세계 지원업무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잠시 생활하던 때였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능하던 그는 중국 학교에 소프트웨어 개발 보조 프로그램을 판매하는 일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익혀온 중국어가 큰 도움이 됐다. 스탠퍼드대 화학과에 조기 입학한 이듬해 싱가포르의 지놈연구소 인턴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중국어 실력 덕분이었다. 당시 사스(SARS·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를 연구하던 이곳에서 홈스는 새로운 방식의 혈액 검사와 신체 데이터 수집 방식을 고안한다. 2003년 가을 홈스는 직접 작성한 특허 신청서를 들고 지도교수를 찾아 “함께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교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그는 아예 자퇴를 하고 창업에 뛰어들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꿈을 좇아 사람들을 돕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길” 바랐던 홈스의 부모는 학자금으로 모아뒀던 돈을 기꺼이 내놓으며 격려했다.
애초 일종의 패치를 개발하려던 그는 여러 시도 끝에 혈액 검사 혁신에 매진하기로 한다. 회사 이름은 치료(therapy)와 진단(diagnosis)이란 단어를 합성해 만들었다. 창업의 목표는 ‘문제 해결’이다. 창업자 스스로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할수록 집중력과 해결 가능성이 높아진다.
피와 주사에 대한 두려움이 혁신 동력
홈스 역시 그랬다. 그는 피와 주사를 유난히 무서워했다. 수술 과정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의사의 꿈을 포기했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다량의 혈액을 채취하는 것 자체가 부담인 환자가 됐든 편안하고 안전하게 임할 수 있는 검사를 꿈꿨다.
그러려면 우선 극소량의 혈액으로도 다양한 검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따끔한 느낌조차 주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전자 침을 개발해야 했고, 검사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사람 손을 거의 타지 않는 실험과 보관법을 개발해야 했다. 나아가 특허와 규제 문제에 통달해야 했고, 기존의 거대 검사업체와 기기제조 업체와도 경쟁해야 했으며, 병원과 제약회사들을 설득해야 했다.
홈스는 10여 년에 걸쳐 이 모든 과정을 거의 소리 없이 해냈다. 미국 특허 18개, 해외 특허 66개의 공동개발자가 됐다. 꼭 필요한 수준의 자금만 유치해 투자자의 지나친 간섭을 막았다. 대신 ‘미국 기업 사상 최고’란 평가를 받을 만큼 화려한 이사진을 꾸려 전략적 도움을 받았다. 조지 슐츠 전 재무장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빌 페리 전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 전 해군사령관, 두 명의 전 상원의원과 유명 기업인, 법조인들.
그들 중 한 명인 키신저는 몇몇 인터뷰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그의 강력한 결단력과 엄청난 지적 능력이 나를 유약한 회의주의자에서 열성적 지지자로 바꿔놨다. 홈스의 목표는 의료비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제3세계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돈은 그의 동인(motivation)이 아니다.”
홈스의 목표는 지구상의 누구나 저렴하고 간단한 혈액 검사를 반복 실시함으로써 자신의 신체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고, 그 변화 추이를 영화 보듯 모니터링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하거나 조기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라노스는 하드웨어기업이자 소프트웨어기업이며, 화학기업이자 데이터분석기업이라 할 수 있다.
테라노스는 지난해 미국 최대 약국체인인 월그린과 함께 캘리포니아주와 애리조나주에 검진센터를 만들었다. 홈스의 계획은 미국 50개 주 8200여 개 월그린 매장 대부분에 검진센터를 여는 것이다. 그는 종종 “테라노스와 결혼했다”고 말한다. 하루 16시간씩 일할 수 있는 체력을 다지고자 커피 대신 영양 균형을 맞춘 야채주스를 마신다. USA투데이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뭘 하며 살고 싶은지 깨닫는 순간, 모든 게 쉬워졌다.”
다른 모든 위대한 변화가 그러하듯, 위대한 창업 또한 그 시작은 신념과 사명감이다.
이나리 은행권청년창업재단 기업가정신센터장 naree@dcamp.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