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보다 로맨스" 85세 女공작의 플라멩코
[가만한 당신] 카예타나 피츠-제임스 스튜어트
수정: 2014.12.13 04:40
등록: 2014.12.13 04:40
스페인 알바 공작 등 46개 작위
세 번 결혼...귀족 사회 위선ㆍ편견 조롱
전통 의무보다 개인 자유 중시
스페인 귀족, 알바(Alba) 여공작이 숨졌다. 향년 88세. 그는 사회 통념과 귀족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고, 연예 스타 못지 않은 관심과 사랑을 누렸다. 그의 이야기는 그가 지닌 유ㆍ무형의 세습 자산들과 함께 회자되곤 했는데, 그것들은 이야기의 흥미를 돋우는 촉매이면서, 그 자체로써 전근대 귀족사회에 대한 로망을 자극하는 독자적인 이야기였다.
알바 여공작은 8개의 공작위를 비롯한 46개 세습 작위를 지녀 기네스북에 오른 ‘지존(至尊)의 혈통’이다. 귀족 서열로는 스페인 왕실이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보다 ‘끗발 센’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2세 직계였고, 만일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했다면 여왕이 될 수도 있는 신분이었다고 한다. 6개의 성(城)과 방대한 세습 영지를 물려받은 스페인의 갑부로, 그가 소장한 그림과 유물이 웬만한 미술관이나 박물관보다 많고, 누가 먼저 모자를 벗어야 하는지 까지 따지는 귀족들의 의전 규범으로 보자면 그는 교황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을 수 있고, 말을 탄 채 세비야 대성당을 들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저 모든 특별한 배경들은 그의 삶을 주목 받게 하는 데 기여했지만, 대중적 호감을 사는 데는 오히려 불리했을지 모른다. 그는 시민들이 상상하기 힘든 사치를 누렸고, 그러면서도 인색했고, 영지 주변의 농민들과 자주 불화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그를 밉지 않게, 아니 호의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신분을 앞세워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전통의 의무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했고, 그 자유를 과시하듯 누렸다. 그가 누린 자유의 많은 부분은 물론 ‘특별한 개인의 자유’였지만, 거기서 시민들은 파격의 대리만족을 느꼈을지 모른다.
한국 언론도 이따금 그를 ‘해외 토픽’같은 소식란에 소개했다. 2011년 그의 세 번째 결혼 뉴스가 가장 최근 일이다. 당시 언론은 신분과 나이를 극복하고 왕실의 반대까지 묵살한 ‘귀족의 로맨스’로 그 사연을 소개했다. 결혼식 사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24년 연하의 연인과 나란히 선 85세 신부(新婦)의 모습은 흔치 않고 쉽사리 잊히지 않을 행복감으로 빛났다. 그의 얼굴은 숱한 성형수술(시술)로도 감추지 못한, 아니 더 도드라져버렸다고 해야 할 세월의 흔적으로 안쓰러웠지만, 그는 더없이 당당했다, 그 당당함 역시 몸에 밴 세습의 자부라 쉽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꾸로, 세월과 관습과 험담에도 주눅들지 않으려는 여인의 열정, 혹은 존엄한 고집을 엿본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는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마리아 델 로사리오 카예타나 팔로마 알폰사 빅토리아 유지니아 페르난다 테레사 프란시스카 데 파울라 로르데스 안토니아 조레파 파우스타 리타 카스토르 도로테아 산타 에스페란자 피츠-제임스 스튜어트 데 실바 팔코 이 구트베이(Maria del Rosario Cayetana Paloma Alfonsa Victoria Eugenia Fernanda Teresa Francisca ce Paula Lourdes Antonia Josefa Fausta Rita Castor Dorotea Santa Esperenza Fitz-james Stuart y de Silva Ralco y Gurturbay), 줄여서 카예타나 피츠-제임스 스튜어트는 1926년 3월 28일 스페인 마드리드 리리아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7대 알바 공작인 돈 자코보 피츠-제임스 스튜어트 이 팔코와 어머니인 도나 마리아 델 로사리오 데 실바 이 구츠베이 후작의 외동딸이다. 장남이 작위를 세습하는 영국과 달리 남녀불문 첫 자녀가 작위를 세습하는 스페인 귀족 전통에 따라 그는 두 거대 가문의 모든 것을 세습한다. 그의 이름이 숨가쁘게 긴 까닭도 그 때문이다. 스페인의 이름들은 부모 양가의 성(姓)뿐 아니라 영적 부모인 대부모의 성도 이어 쓰기 때문에 대체로 길다. 즐겨 쓰는 이름이 상대적으로 적어 별명을 추가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귀족, 특히 알바 여공작 같은 거창한 귀족은 가문의 출신지와 봉토, 세습 작위의 주요 흔적들까지 담기 때문에 이름은 가히 호적의 요약본처럼 길어진다. 실제로 유럽의 족보학자라면 저 이름 하나로 그의 혈통의 내력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이름 속에는 영국 왕가의 흔적과 대부모인 스페인 빅토리아 유제니 여왕 부부의 흔적도 엿보인다.
그는 영국 최고의 명문가로 꼽히는 스튜어트 왕가의 직계, 제11대 베릭 공작이기도 하다. 제1대 베릭 공작인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피츠 제임스(1670~1734)에게서 비롯된 작위다. 1대 공작은 제임스 2세가 말보로 공작의 여동생인 아라벨라 처칠과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로, 아라벨라 처칠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수상의 먼 할머니이고, 모계 후손으로는 웨일즈의 공주 다이애나 전 황태자비가 있다. 그러니 알바 여공작은 윈스턴 처칠, 다이애나 전 황태자비와도 친척인 셈이다. 16세기 유럽의 최강국이던 스페인의 네덜란드 총독으로 ‘철공작’이라는 잔혹한 이름을 떨친 톨레도의 돈 페르난도 알바레스가 3대 알바공작이고, 13대 알바 여공작 도나 마리아 델 필라 데 실바는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연인으로, 문제작 ‘옷벗은 마야’의 주인공이라는 설이 있다. 530여 년 전통의 알바 성주(城主)인 그에게 엘리자베스 여왕이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는 보학자들의 주장은 그래서 터무니없지 않다. 영국의 현 왕가((Saxe-Coburg Gotha)는 1820년대에야 귀족의 반열에 든, 벼락출세 가문이기 때문이다.
저 장황한 핏줄 이야기가 짜증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귀족 사회 특히 아직도 상원 정치 권력의 특권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는 영국이나 지금도 헌법이 국왕의 귀족 서임권을 보장하고 있는 스페인 같은 입헌군주국에서 저 맥락들은 지금도 여전히,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굳건한 자산이다. 그들은 혼인과 사교 등 자신들의 닫힌 네트워크를 오연히 지키고 있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알바 여공작의 생각과 행동, 판단과 선택은 사뭇 달랐다. 2011년 그의 세 번째 결혼을 둘러싼 논란에 세계인이 촉각을 돋운 까닭도 저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피앙세(fiance)는 24살 연하의 사회보장국 하급 공무원 출신의 알폰소 디에스(당시 61세)였다. 첫째 남편과 낳은 자녀들(5남1녀)은 그 결혼에 극력 반발했다. 다들 공작이나 후작 백작위를 서너 개씩 가진 그들은 매스컴을 통해 노모의 연애를 추문으로 비난했고, ‘평민’인 연인을 조롱했다. 결코 ‘귀족적’이라 할 수 없었을 노모의 평소 패션과 돌출적 행동으로 자주 마음 졸였을 그들로서는 노모의 저 사랑이 가문의 명예에 또 하나의 스캔들이 될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문제는 그 결혼이 임박한 유산(遺産) 상속의 달갑지 않은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디에스를 ‘재산 사냥꾼(gold-digger)’이라고 비난했다. 2008년 그들의 염문이 결혼설로 비화한 직후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까지 나서 그의 결혼을 만류했고, 2011년 6월 여공작의 막내 아들인 아르호나공작 카예타노는 알바 여공작의 재혼은 없다며 “어머니가 역사적 책무를 존중하기로 했다”고 가문의 이름으로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바 여공작은 그 모든 반대에 의연히 맞섰다. 자녀들과의 공개적 설전이 뜨겁던 2008년 그는 한 스페인 라디오 방송에 나와 사별로 끝난 자신의 두 차례 결혼 생활과 아들들의 이혼 전력을 대비하며 이렿게 말했다. “(윤리와 책임을 들먹이며) 그들은 지금 내 결혼에 반대하는데, 그들은 나보다 더 자주 (비윤리적으로) 파트너를 바꿔왔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당신들도 누군가를 알게 되고 또 좋아하게 되고, 약간 사랑하다가 아예 사랑에 빠지지 않느냐”며 자신의 사랑이 ‘당신들’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고, 디에스에 대해 “그는 환상적인 남자다. 그가 내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자녀들과 귀족 사회의 위선을 그렇게 조롱했고, 나이를 둘러싼 사회의 편견을 그렇게 일축했다. 여론은 그를 편들었다. 그의 연애 이야기는 2009년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
2011년 알바 여공작은 사후 자신의 전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준다는 약속을 미리 제시하고 디에스 역시 상속권 등 일체의 재산 권리를 포기한다고 선언, 모든 반대를 정면 돌파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알폰소는 나를 제외한 그 무엇도 원치 않았고, 실제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세비야 성에서 보란 듯이 결혼식을 치른 직후 알바 여공작은 하객들 앞에서 구두를 벗고 드레스 단을 걷은 채 열정적인 플라멩코 춤을 선뵀다.
그의 첫 남편은 소토메이어(Sotomayor) 공작의 장남인 해군 장교 페드로 루이스 마르티네즈였다. 1947년 세비야 대성당에서 치러진 결혼식에는 전 유럽의 내로라 하는 왕족과 귀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언론이 “봉건 영주 가문이 치른 최대ㆍ최후의 화려한 예식”으로 꼽은 그 결혼식에서 알바 여공작이 몸에 걸친 보석만 120만 파운드어치였고, 결혼식 비용도 약 200만 파운드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텔레그라프) 1972년 사별할 때까지 부부는 5남 1녀를 낳았다.
6년 뒤인 78년 그는 전 예수회 신부이자 자유주의 지식인, 지저스 아귀레 이 오르티즈 데 자라테(Jesus Aguirre y Ortiz de Zarate)와 재혼한다고 발표, 완고한 가톨릭 교도인 스페인 시민들을 충격에 빠뜨린다. 아귀레는 한때 공작의 고해신부였고, 또 사생아였다. 하지만 그땐 자녀들이 어렸고, 그 역시 52세의 한창때였고, 또 여전히 아름다웠다. 부부의 사생활은 황색 언론의 주요 취재대상이었다. 아귀레가 알바 여공작을 위해 연애시를 지어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에게 노래로 만들어달라고 청한 이야기, 하지만 시가 너무 선정적이어서 이글레시아스가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88년 한 신문이 두 사람의 불화설을 보도하자 62살이던 알바 여공작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처음처럼 행복하다. 당신들이 그렇게 알고 싶어 하니까 하는 말인데, 우리는 지금도 매일 밤 섹스를 한다.” 위엄과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는 귀족이, 그것도 국왕보다 높은 서열의 귀족이 저런 말을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아귀레도 2001년 병사(病死)한다.
젊은 알바 여공작은 미모로도 유명했다. 진위야 알 수 없지만 염문도 적지 않았다. 자녀들 중 넷째 아들인 비센테 델 바르코 후작(돈 페르난도)이 실은 세비야의 미남 플라멩코 댄서 안토니오 엘 바일라린의 아들이며, 그의 사후 비망록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알바 여공작은 그 소문을 처음 보도한 스페인 잡지 ‘인터뷰(Interviu)’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고, 법원은 잡지사에 9만 유로의 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선고했다.(텔레그라프) 알바 여공작은 2009년 세비야 산 페르난도 공동묘지의 묘역 한 자리를 사들이는데 그 자리는 한때 그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한 투우사의 무덤 옆 자리였다.(가디언)
그의 재산 규모 역시 미지수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렘브란트, 고야, 피카소 그림을 비롯한 5만 점에 이르는 작품의 가격을 산정한 적이 없어서다. 예술품 외에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지도 초판본,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초판본, 1429년 판본의 성경 등 1만8,000여 권의 희귀본 도서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태어난 마드리드의 리리아성과 살라만카의 알바 성 세비야의 듀에나 성 등 문화재급 고성과 유럽 각지에 산재한 저택과 별장, 그의 땅을 밟지 않고 스페인을 여행하는 게 힘들 정도라는 방대한 토지 등을 근거로 포보스는 그의 재산을 35억 달러로 추산했지만, 극히 보수적으로 산정된 액수라는 게 중론이다.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에서 그의 재산을 44억 달러로 추정했다.
알바 여공작은 병약했던 어머니를 8살에 잃고, 프랑코 치하에서 영국 대사를 지낸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이주, 결혼 전까지 10여 년을 영국에 살았다. 동갑이자 먼 친척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여왕과는 장난감을 함께 가지고 놀 만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인터뷰에 응하면서 다양한 반응들을 즐겼던 듯하다. 한 잡지 인터뷰에서 그는 “그들이 당신을 잊어버리면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2006년 그가 안달루시아 정부로부터 ‘안달루시아의 딸’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 받은 뒤 지역 농민단체가 사치나 일삼는 부재지주에겐 과한 영예라며 반발하자 농민들을 ‘우범자 무리(delinquents)’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해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삶도 사랑처럼 열정적이었고, 거침 없었다. 결혼식 직전 예비신랑 디에고는 ‘베너티 페어’ 인터뷰에서, 이런저런 구설을 의식한 듯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우리 다음에 뭐할까?’라는 질문을 달고 산다. 가끔은 내가 더 늙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아마 사실을 말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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