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이 남긴 말 "처신 좀 잘해"
주홍글씨 성병 '헤르페스'의 악몽
정신적·사회적 고통... 예산 때문에 완화치료 처방 못 받아
15.01.28 09:28l최종 업데이트 15.01.28 09:28l
▲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두 종류가 있다. 1형은 주로 입술, 구강, 손 등 배꼽 위 부위에 포진이 발생한다. 2형은 성기 근처에 포진이 발생한다. | |
ⓒ pixabay |
"제가 연애를 할 수 있을까요?"
이혜정(가명·23)씨는 성병의 일종인 헤르페스 환자이다. 2년 전 그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자신 때문에 남자친구가 헤르페스에 걸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남자친구는 매정했다. 병원에 다녀온 남자친구는 이씨에게 곧바로 이별을 통보했다. 이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로 아직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씨는 남자친구가 헤어질 때 했던 말만 떠올리면 아직도 고통스럽다. 남자친구가 이씨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처신 좀 잘해"였다.
헤르페스는 '주홍글씨'다. 뚜렷한 치료 방법도 없다. '항바이러스 억제요법'이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되나, 그마저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아래 심평원)이 한정된 예산을 이유로 처방을 제한하고 있다.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두 종류가 있다. 1형은 주로 입술, 구강, 손 등 배꼽 위 부위에 포진이 발생한다. 2형은 성기 근처에 포진이 발생한다. 헤르페스는 접촉(성관계)에 의해 감염된다. 포진은 면역력이 약화될 때 발생한다. 2형 헤르페스 바이러스를 성병으로 정의한다.
헤르페스의 감염률은 다른 질병보다 높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헤르페스 바이러스로 인한 성병 환자는 1999년 2만4401명에서 2007년 9만4259명으로 크게 늘었고, 2012년에는 무려 65만424명으로 집계됐다. 불과 13년 만에 약 26배가 늘어난 셈이다.
발병 8년 차 환자 "아직도 부인이 몰라요"
헤르페스는 환자들에게 정신적, 사회적 고통을 주고 있다. 성병인데 완치방법이 없고 감염률이 높아 정상적인 성생활이 어렵다. 네이버 카페 '헤르페스 환우모임'에는 환자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글들이 끊이지 않고 올라온다. 대부분 육체적인 고통은 참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못 참는 것은 성병으로 생긴 씻을 수 없는 과거이다. 특히 부부나 연인관계에서 생기는 불신은 헤르페스가 남긴 가장 큰 상처이다.
'헤르페스 환우모임'의 회원인 김아무개(남·37)씨는 결혼 5년차임에도 자신의 질환을 부인이 모른다. 김씨는 "벌써 발병 8년 차라 포진이 나기 직전 몸의 반응을 (스스로) 안다"며 "그때마다 (아내와의) 성관계를 피한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 한번 성관계를 피해서 (아내와) 크게 싸운 적이 있다"며 "그래도 절대 나의 병을 (아내에게) 밝힐 순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철저한 관리 때문에 부인이 헤르페스에 걸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환자인 이아무개(여·33)씨는 "헤르페스 이후 출산이 걱정된다"며 "곧 있으면 결혼하는데, 산모가 헤르페스에 걸리면 아이도 헤르페스가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특히 "나도 이렇게 힘든데, 아이까지 병에 걸리는 건 너무 슬프다"며 안타까워했다. 또 "헤르페스에 걸린 이후에 새벽까지 (잠에서) 깨어 있어 본 적이 드물다"며 "피곤하면 생기는 병이니만큼 만사 피곤함에 경계한다"고 토로했다.
"억제요법이 마지막 희망이에요... 저 좀 살려주세요"
"발트렉스 억제요법 처방 제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부탁드려요... 1년에 두세 번 재발할 땐 괜찮았어요. 그런데 7개월째 수포는 올라오지 않고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구증상(포진이 발생하기 전 증상)만 계속되고 있어요. 좋다는 거 다하고 다 먹어봤는데도 하루도 안 빠지고 전구증상은 계속돼요. 욱신거리고 불편하고 불쾌하고... 억제 요법이 마지막 희망이에요.
대량으로 처방받아 구입하신 분들 병원이 어딘지 쪽지로 가격과 함께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사람 한 명 살린다 치고 제발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 1월 26일 '헤르페스 환우모임'에 올라온 글
▲ 헤르페스 환자를 위한 약. 항바이러스제인 발트렉스정이 포함돼있다. | |
ⓒ 이진혁 |
헤르페스 환자들에게 남은 희망은 '억제요법(antiviral suppressive therapy)'이다. 억제요법은 기존에 복용하는 항바이러스제 발트렉스(Valtrex)를 소량(500mg)으로 장기간 복용하는 방법이다. 미국과 호주에선 헤르페스 환자들에게 억제요법을 권한다. 실제 지난 2014년 11월 미국 산부인과학회에서 3000명을 대상으로 임상한 결과, 유의미한 완화 증세가 나타났다. 하지만 게시물의 호소처럼 한국에서는 의사로부터 억제요법 처방을 받기가 쉽지 않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아래 심평원)은 의사가 처방한 약물의 환자 부담금을 제외한 금액을 의사에게 지급한다. 의사의 과잉 처방은 의료비 상승의 원인이 되며, 국가에서 내는 보험료 상승을 초래하기 때문에 심평원은 이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만약 의사가 환자에게 장기간 발트렉스를 복용하는 억제요법을 시행하려면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 심평원에 해명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일단 의사가 환자에게 장기간 투약을 시행한 뒤, 심평원이 발트렉스의 투약일 심사결과(헤르페스의 경우 5일)에 대해 이의신청을 해야 하고, 환자 상담 내역을 증빙자료로 제출해야 한다.
만약 의사의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의사가 발트렉스 투약에 대한 국가부담금을 자비로 내야 한다. 평소에 의사와 안면이 없는 환자라면 억제요법 처방을 요청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 대학병원 피부과 전문의인 서아무개(37)씨는 "잘못하면 내가 손해 볼 수도 있는데, 누가 처방을 해 주겠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심평원 한 관계자는 "실제 헤르페스는 심각한 병이 아니고, 완치도 불가능한 병이기 때문에 완화요법에 많은 예산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는 최대한 건강이 아니라 '적절한' 건강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며 "세금으로 운영되는 예산이 제한돼 있다"고 강조했다.
서씨는 "심평원 주장이 이해가 된다"며 "예를 들어 진료비가 1만 원이 나오면 3400원은 환자가 내고 6600원을 국가가 대신 내니, 장기간 복용은 그만큼 국가 부담이 커지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서씨는 "성병의 경우 환자가 느끼는 정신적, 사회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을 뛰어넘는다"며 "가끔 심평원의 제한이 과도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심평원의 심사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의사들의 요구가 반영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부연했다.
'헤르페스 환우모임'에서는 질병과 관련된 논문이나 자료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고통을 줄이고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들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를 없앨 의약품은 발명되지 않았다.
한 환우는 "신호등이라 생각한다, 헤르페스가 오려고 하면 '아 몸이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라는 몸의 신호등"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언제 '빨간불'이 들어올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진혁 기자는 21기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