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천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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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의 INTERVIEW |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가끔 범접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때가 있다. 비올라 연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도 그 중 한사람이다. 아직 30대인 그의 이력은 그야말로 '후덜덜'이다. 줄리어드 음대에서 비올리스트 최초로 아티스트 디플로마 수여. 최우수 오케스트라 솔로 협연자 부문을 비롯한 그래미상 두 개 부문 후보. 에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 수상.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이 이끄는 런던 필하모닉,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닉, 서울 필하모닉, 모스크바 챔버 오케스트라 등과 솔리스트로 협연. 링컨 센터 챔버 오브 뮤직 소사이어티의 정식단원. UCLA의 최연소 교수. 총 일곱 장의 솔로 앨범과 한 장의 베스트 앨범 발매. DITTO 페스티벌 음악감독이자 앙상블 디토의 리더. 이 모든 업적을 인정받아 뉴욕시 의회로부터 명예로운 시민상 수상. 그밖에도 쉼없이 이어가고 있는 정상급 뮤지션들과의 콜라보 활동과 각종 홍보대사 역할까지 셈에 넣으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 딱 드는 생각이 있다. 천재이거나 수퍼맨이거나. 둘 중 무엇이 되었든 어쩐지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용재 오닐씨는 그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송되면서 인간적인 모습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 낳은 고아이자 정신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어머니는 미국인 부모에게 입양되었고 용재 오닐씨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채 성장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마저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에 너무 촛점을 맞추어 그의 비범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강호동씨가 진행하는 토크쇼에서 그를 보았다. 언제였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느낌만큼은 생생하다. 그는 몇마디 말만 듣고서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그런 타입이었다. 아무런 치장이나 가식없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순수함이 향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사람. 어린 시절의 아픔을 이야기할 때, 삶을 지탱해주는 힘에 대해 고백할 때, 뮤지션으로서의 고뇌를 털어놓을 때 그의 눈빛, 목소리, 표정에서 묻어나는 진실함이란 엄청난 소용돌이 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적인 비올라 연주자라는 타이틀 뒤에 감추어진 인간 용재 오닐의 무한 매력에 마구 끌렸다. 그후로 그의 연주를 일삼아 찾아 들었다. 두말 할 필요없이 훌륭한 그의 음악 위에, 브라운관을 통해서나마 느낀 인간적 매력이 더해져 나는 곧 그의 팬이 되었다.
언젠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 생각했더니 정말로 기회가 찾아왔다. 연말 행사장에 사회를 보러 갔는데 그가 출연자로 나온 것이다! 리허설을 마치자마자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했다. 마침 이튿날은 그가 다시 뉴욕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다음 한국 방문 때 꼭 만나겠노라던 그는 정말로 약속을 지켰다. 리처드 용재 오닐씨가 한국에 오면 늘 묵는다는 서울 시내 한 호텔의 VIP 라운지에서 그를 기다렸다. 커피를 두어 모금 마시고 있을 즈음 그가 나타났다. 클래식 뮤지션이기에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대개 정장차림이다. 그런데 그날은 후드티를 안에 받쳐 입은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역시나 케이스 안에 든 비올라가 들려있었다. 토크쇼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용재 오닐씨는 겸손하고 수더분하고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듯 보이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다가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단,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의 비올라 케이스에 손을 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리처드 용재씨는 무척이나 쑥스러워했다. 그렇게 많은 콘서트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사진찍기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일까? 그런데 비올라를 손에 쥐는 순간 그의 표정은 삽시간에 달라졌다. 마치 비올라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고 비올라가 용재 오닐씨를 안심시켜주는 형이나 누나로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고대하며 사진 촬영을 위한 조명 스태프 일을 자청하는 것마저 즐거웠다. 드디어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나는 우선 '안녕, 오케스트라' 프로젝트에 대해 묻기로 했다. 용재 오닐씨가 처음엔 우연한 계기로 한국에 왔다고 하는 게 맞을 텐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쪼개어 한국을 찾는 이유가 생겼다. 지난 2년간 정성을 들인 '안녕, 오케스트라'가 바로 그것이다. '안녕 오케스트라'는 경기도 안산의 다문화 가정 및 소외 계층 아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다. 용재 오닐씨가 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으며 2013년 다큐멘터리로 제작, 영화관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디에도 없는, 정말 의미 있는 음악 집단이에요. 참가자인 아이들은 대부분 집안 사정이 어렵기 때문에 음악 공부를 하는 건 꿈 같은 일이죠. 그런데 이 꼬맹이들이 자기 몸집보다도 큰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요.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집중해서 악기를 켜는 걸 보고 있으면, 마치 삶이 아름답게 순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요. 그래서 후원을 못 받게 될까봐, 이 음악이 끝나게 될까봐 걱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기적 같이 후원을 다시 받게 되었죠. 앞으로 1년이 남았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안녕. 오케스트라'는 아마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는 핫한 오케스트라 중 하나일걸요? 연말에 크리스마스 콘서트도 열었고, 제작년에는 부산에서 콘서트를 하기도 했죠. 정말 잘해요. 재능도 많고요. 처음 시작했을 때는 다들 초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중학생도 있어요."
"그 아이들에게 그토록 애착을 갖게 되신 이유가 있나요?"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모든 생명은 소중하잖아요. 아무도 어느 누가 더 소중하다 아니다라고 판단할 수 없어요. 우리가 함께 존재하는 것은 기적이에요.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하고 이 세상에 오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혼혈로 태어난 건 그들이 선택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 그 아이들에 대한 차별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차별은 안 좋은 거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문화 가정에 대해 반감이 있어요. 험한 말을 하고 욕을 하죠.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인간적으로 존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일을 하고 싶어서 머나 먼 고향을 떠나 왔고, 돈을 벌어 자신들의 가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이런 시도들이 분명 이 사회를 더욱 진보적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이들을 좋아해요. 우주를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은 정말 즐겁습니다. 제게 가장 큰 걱정은 프로젝트가 끝난 뒤 사회의 인식이나 사람들의 믿음이 바뀌면 어쩌나, 그러면 이 아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하는 거에요. 예술가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도 있어요. 저는 예술이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의 삶을 진실 되게, 혹은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니까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계속해서 음악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인식도 인식이지만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녹록지가 않거든요."
"음...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국의 교육 현실은 아이들한테 대학 입시만 강조하는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한국 교육에 대해 많이 느꼈어요. 아이들, 부모님, 교육자들과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한국은 몇 안 되는 SKY 대학, 그러니까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만 가도록 아이들을 부추기는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 봤을 땐 정말 희한하고 충격적인 일이에요. 미국에도 SAT 같은 대학 입시 제도가 있지만 학생의 다양한 인성과 지성을 보려고 하는 면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잔인한 것 같아요. 아주 소수만 갈 수 있는 상위 대학을 위해 다들 매진하잖아요. 이 작고 여린 아이들이 그런 시스템 하에서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자신의 유년기를 즐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요. 좋은 성적을 내고 대학 가는 일에만 열을 올리면 예술적 지성은 어디서 배우고 기르는 거죠?"
저릿하고 날카로운 물음이 날아왔다. 나 역시 그런 한국 아이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어릴 적에 피아노를 한 번쯤은 배우고, 학원을 다니고,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했다. 마치 '대한민국 교육 매뉴얼'에라도 나와 있는 것처럼. 한국의 아이들, 그것도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보아 온 용재 오닐씨에게 우리의 교육 현실은 잔인해 보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음, 맞는 말이에요. 그럼, 당신의 유년기는 어땠나요? 어떤 추억이 있나요?"
"제 유년기는, 음,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스폰지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잖아요. 그래서 어릴 때 많이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이들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책임감이 길러지는 것 같아요. 학교를 마친 후엔 정말 바빴어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했죠. 많은 끈기와 인내심이 필요한 때였죠. 그땐 틈이 나면 주로 제 고향인 세큄에서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세큄은 시애틀 외곽에 있어서 복잡한 도시와는 동떨어져 있고, 자연 풍광이 참 멋진 곳이에요. 그런 곳에서 자란 건 큰 행운이에요. 조금만 드라이브하면 근사한 풍경들이 나타나죠. 특히 겨울이 되면 숲에 안개가 많이 끼었어요. 해가 있는 날이 정말 적죠. 그 때 그 축축하고 조용한 숲 속에서 나무와 이름모를 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몽환적이고 마술 같았어요. 정말 아름다웠죠. 이 모든 게 저에게 자산이 된 것 같아죠. 안 좋았던 점은, 음, 글쎄요. 우리는 두 부분을 다 가진 존재잖아요.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좋은 점과 나쁜 점을요. 지금의 '나'는 지난 날 내가 했던 일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불행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있었다 한들 되돌릴 수도 없고요. 그래서 저는 사람을 만날 때도 그 사람이 좋다, 안 좋다 같은 기준 혹은 판단을 잘 안하려고 해요. 만약 제가 어릴 적에 집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연습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되었겠죠.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음악적 삶에 최선을 다했고, 그때의 노력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으니까요."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을 보면 용재 오닐씨의 유년시절에는 아픈 과정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이러한 긍정 에너지와 강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금의 용재 오닐이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셨다는 할머니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과연 어떤 분이었을까.
"다섯 살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 그는 열 다섯살 때 비올라로 악기를 바꾸었다 - 할머니는 저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셨고 아무리 멀어도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곳이면 묵묵히 저를 데려다 주셨죠. 하지만 할머니는 당신의 손자가 슈퍼스타나 유명한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으셨어요. 아주 현실적인 분이었기에 세상에는 재능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인정하고 아예 그런 기대는 안 하셨죠. 그보다는 책임감 있는 사람, 올바른 시민이 되는 걸 원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악기 연주하는 걸 처음 보시고는 저의 재능을 이용해 좋은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대요.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게 마냥 좋았어요. 대신 저에게는 보상이란 것도 일절 없었죠. 예를 들어 '네가 이걸 다하면 초콜릿 케익을 줄게' 이런 거 있잖아요. 할머니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완고하셨어요. 끈기와 인내를 가르쳐 주셨죠. 자기 동정 같은 건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고요. 할머니는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씀도 잘 안 하셨어요. '예쁘다', '잘 한다' 이런 칭찬도요.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클래식 음악 연주자에게 개인의 감정이나 상황은 중요하지 않아요. 일단 무대에 섰으면 물러나서는 안 되니까요. 물론 어려운 일이었지만 할머니의 그런 완고함이 저에게 도움이 되었어요."
"다섯 살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 그는 열 다섯살 때 비올라로 악기를 바꾸었다 - 할머니는 저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셨고 아무리 멀어도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곳이면 묵묵히 저를 데려다 주셨죠. 하지만 할머니는 당신의 손자가 슈퍼스타나 유명한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으셨어요. 아주 현실적인 분이었기에 세상에는 재능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인정하고 아예 그런 기대는 안 하셨죠. 그보다는 책임감 있는 사람, 올바른 시민이 되는 걸 원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악기 연주하는 걸 처음 보시고는 저의 재능을 이용해 좋은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대요.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게 마냥 좋았어요. 대신 저에게는 보상이란 것도 일절 없었죠. 예를 들어 '네가 이걸 다하면 초콜릿 케익을 줄게' 이런 거 있잖아요. 할머니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완고하셨어요. 끈기와 인내를 가르쳐 주셨죠. 자기 동정 같은 건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고요. 할머니는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씀도 잘 안 하셨어요. '예쁘다', '잘 한다' 이런 칭찬도요.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클래식 음악 연주자에게 개인의 감정이나 상황은 중요하지 않아요. 일단 무대에 섰으면 물러나서는 안 되니까요. 물론 어려운 일이었지만 할머니의 그런 완고함이 저에게 도움이 되었어요."
"토마스 에디슨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 천재를 만든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위대한 음악인이 되려면 몇 퍼센트의 천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천재성을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많아요. 무엇을 타고나느냐보다 타고 난 재능을 후천적으로 어떻게 기르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 거에요. 경영이든 의학이든 음악이든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하려면, 천재성보다는 얼마나 헌신적으로 그 일에 집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 이기려는 생각은 아예 잊고 수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해요. 미켈란젤로 같은 위대한 예술가를 예로 들어볼게요. 그도 처음부터 위대한 피에타를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작업한 건 아닐 거에요. 1,000시간, 10,000시간을 투자해 그리고 또 그리면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낸 거죠. 무대에서 연주하는 애들을 보면 긴장하다 못해 막 떨다가 공연을 망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선 이렇게 말하죠. 열심히 했는데 왜 그랬을까. 근데 제가 보기엔 그냥 보통으로 연습한 거예요. 1,000시간을 연습하고 무대에 나갔는데도 엉망이 되었다면 잘 생각해보아야 해요. 정말 열심히 했는지,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했는지, 1,000시간을 해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10,000시간을 향해 왜 전진하지 않았는지요. 위대한 음악 역시 삶을 헌신했을 때 만들어 집니다. 오직 그 속에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요. 계속 도전하면서 연마해야 하고 거기서 개인적인 의미를 찾아야 해요. 그래서 몇 퍼센트의 노력이라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끊임없는 자기 연마와 헌신의 과정이 곧 예술이고 천재가 되는 길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결연함마저 비쳤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 나오는 확신일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용재 오닐은 말한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열심히 자기 일에 매진하고 스스로를 연마하라'고.
"끊임없는 자기 인내와 헌신이라. 당신이 연주하는 비올라도 그 헌신의 세월을 함께 견뎠겠어요. 오늘 가지고 오신 비올라에 대해 알고 싶어요. 음악가에게 악기는 자기 몸의 일부와도 같지 않나요?"
"저는 제 비올라를 사랑해요. 1727년에 '마테오 고프릴러'라는 베니스의 장인이 만든 거예요. 정말 아름다운 비올라죠. 5년 전 뉴욕에서 샀는데, 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악기랑 교환했어요. 첫 번째 주인이 가지고 있다가 그가 죽고 나서 재산 목록에 있던 걸 미망인이든 누가 팔았고, 그렇게 시장에 나오게 된 것 같아요. 근데 이렇게 악기가 시장에 나오면 주인을 잘못 만날 수도 있는데, 우린 서로 아주 훌륭한 상대를 만난 거죠. 이 비올라랑 전 세계를 여행했어요. 비올라를 가지고 다니면 항상 행복하고 뿌듯하지만, 불편한 점이 있다면 비행기 탈 때 많은 사람들이 비올라가 뭔지 모른다는 거예요. 승무원이나 승객들이 자기 짐짝처럼 제 악기를 던질 때가 있어요. 누군가가 제 비올라를 막 대할 때 저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요. 왜냐면 그건 제 삶이고, 목소리고, 영혼이고, 제가 세상과,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니까요. 생명이 있는 존재거든요. 적어도 저한테는요.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의 성격이 있듯, 악기들도 똑같아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악기들도 느끼고, 다른 악기들의 소리를 들어요. 신기하죠. 연주자랑 싸우기도 하고요. 부드럽게 진동이 되어야 연주를 시작할 수 있는데, 만약에 나무 조각들과 실이 진동하지 않는다면 악기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신호에요. 진짜로 살아있는 생명체 같아요."
그가 비올라를 바라보고 쓰다듬은 모습은 정말로 다정하고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했다.
"그럼 혹시 이 비올라... 이름도 있나요?"
"물론이죠. 이 친구 이름은 고릴라에요."
"고릴라요? 고상한 악기에 붙은 이름치고는 좀... "
"맞아요. 이상한 이름이긴 하죠. 친구가 붙여준 거에요. 제 비올라를 만든 고프릴러의 이름이 웃기다면서 그와 비슷한 고릴라라고... 하하"
아무리 이야기를 나누어보아도 그의 삶은 온통 비올라로 가득찬 것만 같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말고, 인간 용재 오닐이 원하는 것, 혹은 목표로 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그는 어디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음, 행복은 종착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행복은 그보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것'에서 비롯하는 일종의 부산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해야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 안에 행복이 있어요. 지난 2년간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했고, 친한 친구가 아프기도 했고, 어머니가 늙어가고 나 역시 늙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삶의 사이클이 얼마나 빠른지 보고 있으면, 불확실한 미래에 있는 어떤 걸 계속 추구하지 못하겠더라고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내가 건강하고, 엄마가 건강하고, 내가 아이들이랑 연주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그것이야말로 삶이 주는 선물 같은 거잖아요. 그러니 이미 행복은 제게 있는 거라고 믿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일을 하고 늙어가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심각하게 미래를 생각해야 할 나이일 수도 있지만, 아직 이 다음 단계에 뭐가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의 말에 나는 마음 속 깊이 공감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한사람을 잃었다. 인생에 대한, 온갖 관념들에 대한 정의가 일순간 무너져 휩쓸려가는 것을 바라보았고 현재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을 나역시 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것만큼은 꼭 하고 싶다고 꿈꾸는 일이 있지 않나요?"
"글쎄요. 엄마랑 더 가까워지는 것? 지금도 사랑하지만,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각자의 세계가 있는 독립적인 사람들이니까 꼭 엄마와 같이 살지 않더라도 늘 가까이에서 돌봐드리고 싶어요. 할머니가 저를 사랑으로 길렀던 것처럼. 그리고 일에 있어서의 꿈이라면... 글쎄요, 계속해서 비올라 연주를 즐기며 사는 것?"
음악을 하는 많은 아이들은 유복한 집안에서 나고 큰 도시에 살면서 음악적인 동기 부여나 자극을 받는다. 하지만 이 천재 비올리스트는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정신지체를 앓았고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 최고의 선생님에게 교육을 받지도 좋은 악기를 사지도 못했다. 동네 교회의 연주자에게 적은 돈을 주고 처음 악기를 배웠고 무언가가 필요할 때마다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땐 뭐랄까, 좀 벌거벗은 기분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모든 것에 감사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아니, 거의 모든 질문에 그는 지금의 자신과 자신의 삶에, 그리고 인생길에 만난 모든 사람과 사건들에 감사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어쩌면 서른 명도 넘는 아이들을 입양한, 평범하지 않은 조부모의 헌신적 사랑이야말로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용재 오닐씨의 비올라 연주와 인생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확실하다. 그가 받은 사랑과 관심을 다른 이들에게, 사회에, 다음 세대에 다시 돌려주는 것이다.
백가지를 가지고 태어나도 단 하나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자기가 가진 힘을 악용해 없는 자들에게 피해나 주지 않으면 다행인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행운이 따르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모두 강인한 인성과 피나는 노력으로 이겨내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나누며 사는 이런 사람도 있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내가 만난 그는 천재적인 음악가인 동시에 한편으론 따뜻하고 여린 마음을 지닌 평범한 30대 청년이었고 그런가 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두려움없이 전진하는 투우 같았다. 조만간 아름다운 음악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또 한 번 한국을 찾는다는 그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향기로운 사람이 머물다 간 자리엔 그윽한 향이 남아 돌듯이 그가 다녀갈 즈음 맞게 될 봄의 문턱엔 한층 따스한 기운이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감돌게 되리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의 공연 <로맨티스트>는 오는 3월3일(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며 1950년대 재즈 음악을 다채롭게 편곡해 선보일 예정. 팝 피아니스트 윤한과 크리스 리,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도 함께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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