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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선장 한 명 탓인가, 그래서 세상은 좋아질까

선장 한 명 탓인가, 그래서 세상은 좋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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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대참사가 일어나 버렸다.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보내던 1995년 6월, 도쿄의 어머니가 갑자기 "괜찮냐? 위험하지 않느냐"고 전화를 걸어오셨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본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던 것이다. 그 사건 기억이 난다. 20년 지나서 이젠 한국도 그런 대규모 사고는 없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흘러넘치는 한국 언론 보도를 도쿄에서 정리하고 있다. 수사기관은 선장이나 선원이 승객보다 먼저 탈출했다고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 같다. 일본 언론도 선장이 얼마나 무책임한 사람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 행동에는 분노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굳이 묻고 싶다. 한국 사회는 또 이번에도 선장 혼자에게 욕설을 퍼부어서 빨리 잊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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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P
기억이 난 사고가 하나 더 있다. 내가 일본 오사카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던 2005년 4월 25일 오전 9시 18분, 만원의 통근 전철이 오사카로 가는 길에 커브를 틀지 못하고 아파트에 충돌해, 107명이 숨지고 56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다. 대학 입학식을 마친 지 얼마 안 된 여대생들, 아이 4명의 아버지...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학교나 회사로 떠났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부서진 차량 안에서 피해자를 구출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세월호 사고처럼 초조해하면서 구출 소식을 기다리는 가족을 찾아다닌 날들이 떠오른다.
전철은 23세의 남성 운전기사가 운전했고, 직접 원인은 과속이었다. 운전기사는 과거에도 실수를 잇따라 저질러 재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실수를 연발해 도착 시간 지연을 만회하려고 서둘렀던 것 같았다. 더 이상 실수가 드러나면 운전기사에서 강등될까 봐 두려워했던 것 아닌가 싶다. 운전기사도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정부 사고조사위원회는 그러한 배경을 캤다.
그러나 "미숙한 운전사 한 명 탓이다" 식의 비난은 언론도 일본 사회도 퍼붓지 않았다. 그렇게 힐책하는 유족들이나 생존자, 철도회사 사원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큰 소리가 아니었다. 초점은 "왜 운전기사는 그런 상황에 몰렸을까?"로 압축됐다.
그것은 아마, 적지 않은 유가족과 부상자들이 "다시는 우리와 같은 아픔을 누군가가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사고의 교훈을 재발 방지에 살리길 바란다. 아니면 희생이 쓸모 없게 돼 버린다"고 원했고 사회도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운전기사에게 책임을 돌려 결국 국철에서 분할 민영화된 철도회사나 행정 당국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했던 것이다.
유족들은 단합해서 사고를 일으킨 철도회사와 재발 방지책, 피해자 보상 등을 끈질기게 교섭했다. 철도회사는 승무원의 안전 교육에 힘을 쓰게 됐고 재교육 제도가 징벌적 성격이 너무 강해서 운전기사에게 압박을 준다고 비판 받자 더욱 실천적인 커리큘럼으로 바꿨다. 도착 시간을 중시하는 철도 운행 시간표가 운전기사에게 압박이 된다고 지적 받자 도착 시간도 늦췄다. 정부는 사고 현장을 비롯해 전국의 급커브에 속도를 자동으로 낮추는 안전 장치를 설치했고, 원래 국토교통성 기관이었던 사고조사위원회도 보다 독립성이 높은 '운수안전위원회'로 강화됐다.
이번 사고의 선원들은 어떨까. 승객 목숨보다 자기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도망쳤다면 선원들은 직업에 자부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해상 안전을 맡겨야 하는 상황은 구조적으로 건전한가? 그런 사람들에게 승객 안전 훈련이나 책임감 교육을 하는 것을 작은 해운 회사만 책임져야 할까? 선장은 1년 단위의 비정규 직원이었다는데 자부심을 갖고 승객 안전에 책임질 만한 대접인가. 도대체 선장은 자랑스러운 직업으로서 사회에서 인정 받고 있을까?
엉터리 건물을 지어 붕괴시킨 백화점 회장, 지하철에 불을 지른 미친 남자... 사회가 악인을 만들기는 쉽다. 특히 수사기관은 유족의 한을 풀기 위해 악인을 찾아내고, 때로는 억지로 만들어내고 나름대로의 '정의'로 철저히 문책한다. 물론 책임 있는 자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악인을 규탄하는 재판에서 업계의 구조적 착취 구조나, 승무원의 안전 교육을 게을리하는 업계 구조, 행정기관의 책임 등 배경 요인 규명을 기대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책임 추궁과는 일단 상관없기 때문이다. 사법 절차와는 별도로 원인을 조사할 수 있는 독립성 높은 사고 조사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쁜 놈을 교도소로 보내고 사건은 잊힌다. 사회는 사고의 교훈을 일시적으로 공유할 뿐 또 사고가 되풀이된다. 1993년 서해 훼리호 사고를 대부분 사람들이 잊어버렸듯이.
선장, 선원, 해운사만이 아니라 법규와 정부기관의 책임을 검증하려는 보도가 점점 나오기 시작한다. 늙은 현장 책임자 한 명을 악마로 만든 사이, 정말 나쁜 악마는 숨어서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선장의 행위를 "살인 같은 행태"라 비판했다는데 선장을 화풀이 틀로만 소비하지 말고 정말 악마와 오래 시간을 걸쳐 싸워야 할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 가족의 생환을 바라는 사람들, 기적적으로 생환한 사람들, 혹은 텔레비전 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모든 한국인도 지금은 그런 정신적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잃어버린 수많은 젊은 목숨을 위해 재발 방지에 힘써주길 바란다.
후쿠치야마선 사고가 발생한 지 4월 25일로 9년이 된다. 올해도 위령식이 열리고 현장을 찾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도 매년처럼 사고 현장을 찾아갈 계획이다.

[한겨레] 굿바이! 불안한 한국... 북유럽행 이민 뜬다

굿바이! 불안한 한국...북유럽행 이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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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MIGRATION
행복지수 높고 빈부격차 크지 않아
30~40대 고학력·전문직 부쩍 늘어 
“세월호 참사 뒤 상담자 2배 증가”
송아무개(34)씨는 10월이면 ‘덴마크 사람’이 된다. 1년여 준비 끝에 동갑내기 아내와 돌이 갓 지난 아이까지 이민을 가기로 했다. 당장은 3년간 체류할 수 있는 비자(그린카드)를 받았지만 취업해 자리를 잡으면 영주권까지 얻을 작정이다. 대기업 정규직인 그가 모국을 뜨는 이유는 뭘까.
“우리나라는 50살이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데, 덴마크는 60살 넘어도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요. 스웨덴 사는 친구 얘기를 들으니 북유럽 쪽은 기혼여성 취업률이 80% 이상이라 오히려 일을 안 하면 이상하게 생각한대요. 와이프도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데 한국에서는 어렵잖아요. 아이 키우기도 좋다고 하고요.” 송씨의 이민 결심 이유는 끝이 없었다.
복지국가로 알려진 북유럽 국가들로 이민을 떠나는 30·40대가 부쩍 늘고 있다. ‘복지 쇼핑’을 목적으로 한 ‘가난한 유럽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큰 북유럽도 고학력·전문직의 이민은 상대적으로 반기는 추세다.
외교부의 ‘재외동포현황’ 통계를 보면, 2013년 덴마크에 사는 재외동포는 2011년에 견줘 83.6%(293→538명)나 늘었다. 송씨 가족처럼 영주권 획득이나 자영업 등을 목적으로 장기 체류하는 ‘일반 체류자’ 비율이 3배(120→358명) 가까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유학생 체류자’가 3.6배(253→903명)나 불어났다. 외교부 영사서비스과 관계자는 25일 “유럽은 바로 이민이 가능하지 않고 취업이나 유학을 먼저 한 뒤에 현지에서 영주권을 획득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네덜란드의 경우 영주권자도 2년 사이에 38.9%(614→853명)나 증가했다. 노르웨이 영주권자는 26%(144→182명) 늘었다.
이들 국가는 2012년 대선 당시 복지국가 담론이 퍼질 때 ‘롤모델’로 거론됐던 곳들이다. 주한 덴마크대사관 영사과 관계자는 “행복지수가 높고 빈부 격차는 크지 않은 나라라는 기대치를 갖고 문의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회원이 4만6000여명인 한 포털사이트의 이민 카페에는 하루에도 4~5건씩 북유럽 이민에 대한 질문이 올라온다. 전문직종에게 유리한 덴마크의 기술이민이나 7000만~1억원 정도의 재정보증을 할 경우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스웨덴 사업이민에 대한 질문이 많다. 이민 법률자문을 하는 유영근 변호사는 “미국은 비숙련 노동자도 이민을 받아주기 때문에 학력이나 영어 점수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북유럽은 의사나 공학박사 등 전문직이라야 수월하다”고 했다.
이와 달리 미국으로 삶터를 옮기는 이들의 증가세는 주춤해졌다. 외교부 통계를 보면, 미국 시애틀은 오히려 재외동포가 1.8% 줄었다. 송씨 역시 이민을 모색할 때 ‘전통의 이민 강국’ 미국은 일단 배제했다. 송씨는 “대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6개월 정도 미국에 있었다.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고 열심히 일하지만 그만큼 보상을 못 받는 건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똑같다”고 했다. 최근 송씨에게는 덴마크 이민 방법을 묻는 지인들의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부러워한다”고 했다.
이민 카페를 운영하는 새미 리(42)는 “원래 미국·캐나다·호주 이민 컨설팅을 주로 했는데 최근 컨설팅의 절반 정도가 유럽 쪽으로 옮겨갔다”며 “세월호 사건 이후로 상담자가 2배 이상 늘었다. 한국 사회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이민을 실행에 옮기는 분들도 많다”고 했다.

[조선일보] 에스토니아호 침몰 20년... 스웨덴 국왕 "갈등 겪었지만 화합 일깨운 세월"

에스토니아號(스웨덴·에스토니아가 공동 운항했던 여객선) 침몰 20년… 스웨덴國王 "갈등 겪었지만 화합 일깨운 세월"

  • 파리=이성훈 특파원 
  • 양모듬 기자 
  • 이순흥 기자
  • 입력 : 2014.09.30 02:57

    [852명 희생된 '北유럽의 해상 참사'… 길고 길었던 事後 수습]

    - 사고 현장… '수중 무덤'으로
    스웨덴, 인양 비용 치솟자 水葬… 증거 부족으로 1명도 기소 못해
    유족 분노 들끓었지만 각계 원로로 구성된 '윤리委' 통해 여론 수렴하며 유족 설득

    - 재발 방지 노력 '현재 진행형'
    사고 위험 높은 로로船 단계 폐지, 선박용 블랙박스 세계 첫 도입
    기관실 이중으로 제작… 최악 대비

    세월호 침몰 사고가 30일 168일째를 맞는다. 그 후 사고 수습은 상처를 치유하기도 했지만 예상 못 한 커다란 갈등을 만들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29일 "한국을 단결시켰던 세월호 사고가 지금은 한국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20년 전인 1994년 9월 28일 북유럽 발트해에서 선박 사고가 일어났다. 에스토니아를 떠나 스웨덴으로 향하던 에스토니아호(號)가 폭풍에 침몰해 17개국 852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세월호를 능가하는 참사였다. 이익에 집착해 악천후에 출항을 강행한 점, 화물을 대충 실은 안전불감증 등 사고 원인도 비슷했다. 승객을 버린 승무원의 비열함은 도를 넘었다. 생존자 137명 중 3분의 1이 승무원이었다. 여성 승객 97%가 숨졌고, 12세 이하 어린이 승객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에스토니아호의 피해 당사국·당사자들은 어떤 20년을 보냈을까. 인내하고 양보하면서 성숙하게 사고를 수습했을까, 아니면 우리처럼 갈등하고 갈라졌을까.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이 28일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 20주년 추모식이 열린 스웨덴 스톡홀름 희생자 추모비 앞에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1994년 침몰 사고 당시 전체 탑승 989명 중 852명이 사망했다. 스웨덴은 자국민 501명이 사망, 피해국 중 인명 피해가 가장 컸다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이 28일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 20주년 추모식이 열린 스웨덴 스톡홀름 희생자 추모비 앞에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1994년 침몰 사고 당시 전체 탑승 989명 중 852명이 사망했다. 스웨덴은 자국민 501명이 사망, 피해국 중 인명 피해가 가장 컸다. /AP 뉴시스
    지난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에스토니아호 침몰 기념공원. 852명의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벽 앞에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68)가 꽃다발을 바치고 묵념했다. 유럽 17개국에서 몰려든 유족 대표들도 고개를 숙였다. 20년 전 사고로 501명의 국민을 잃은 스웨덴의 국왕은 "에스토니아호 침몰은 스웨덴에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지만, 공동체와 화합의 필요성도 일깨워주었다"며 "제가 할 일은 국민을 위로하고 단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에스토니아호 희생자 852명 대부분은 아직 핀란드 해저(海底)에 잠들어 있다. 스웨덴 정부는 선체 인양과 실종자 수색을 포기하고 사고 현장에 자갈 수천t을 붓고 콘크리트 막을 씌워 '수중 무덤'을 만들었다.

    보고서 내는 데만 3년

    에스토니아호 사고는 책임 소재만 4개국에 얽힌 고차(高次) 방정식이었다. '독일산(産) 여객선을 에스토니아 해운사가 스웨덴 감독하에 핀란드 해역에서 운항'하다 난 사고였기 때문이다. 다국적 사고조사위원회가 바로 다음 날 꾸려졌지만 국가 간 증거 전쟁과 감정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침몰 이후에야 객실 방송을 한 뒤 구조대가 오자 먼저 탈출한 에스토니아 선원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스웨덴엔 공동운영 책임자로서의 관리 부실이, 핀란드 해경(海警)에는 미숙한 초동대처에 대한 질책이 나왔다. "배의 외벽이 약했다"는 지적으로 20년 전 에스토니아호를 건조한 독일 기업에도 화살이 돌아갔다.
    
 스웨덴 에스토니아호 이후 이렇게 바뀌었다 정리 표
    수습 과정에서 스웨덴 당국도 우왕좌왕했다. 사고 초반 구조자가 훨씬 많은 것으로 잘못 집계했다가 유족들을 허탈하게 만들었고, 언론들은 희생자 여권 사진을 가져다 공개하는 등 무분별한 보도 경쟁을 벌였다. 여야 정치권은 유족을 달래려 "돈이 얼마가 들든 무조건 선체를 인양하겠다"고 덜컥 약속했다가, 결국 비용이 치솟자 번복하고 '수장(水葬)' 카드를 내밀면서 또 폭풍을 겪어야 했다.

    증거도 水葬… 기소자 '0'

    이런 혼란과 갈등 속에서 최종 보고서는 3년 뒤인 1997년에야 나왔다. 모두가 기다린 보고서의 결론은 "선체 결함과 자연재해, 관리부실, 구조 미흡 등 모든 요소가 복합된 사고"라는 것뿐이었다. 수사를 맡았던 스웨덴 검찰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선장을 포함해 관계자 중 단 한 명도 기소하지 못했다. 모두에게 책임을 돌리다 보니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어렵게 된 것이다. 에스토니아호는 사실상 미제(未濟) 사건이 되고 있었다.

    격분한 스웨덴의 유가족들은 선주(船主)나 조선업체, 운항사협회에게 화살을 돌리고 배상을 요구했다. 정부와 검찰을 믿지 못한 일부 유가족은 단독 조사에 착수하거나, 제3국에 "독립적인 전문가 그룹이 투명한 절차에 따라 재조사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결정적 증거'인 선체 자체가 수장된 상황에서 남은 것은 유족들의 절규와 각국과 보험사가 얽힌 책임 공방, 일부 과격 세력이 양산한 음모론만이 남게 됐다.

    유족들 아픔 묵묵히 달래

    시간이 지나며 유족 대부분은 현실을 인정하고 보험사가 제시한 보상금을 받아들였다. 스웨덴에서 통상 해양사고 1건당 지급되던 평균 금액 2억6000만 크로네(377억원)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웨덴 정부가 초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는 실패했지만, 묵묵히 국민 마음의 상처를 달래려 노력했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대신 중립적인 각계 원로로 윤리위원회를 꾸려 여론을 수렴했다. 1995년 수중 무덤을 만들 때도 인양을 원하는 유족을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희생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고지역 접근금지' 국제조약까지 마련했다.

    선박 구조부터 해양법까지 손질

    이후 스웨덴은 해양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안전 선박 도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제해사기구(IMO)를 통해 사고 위험이 높은 로로선(승객과 화물을 함께 싣는 선박) 운항을 단계적으로 폐지했다. '선박용 블랙박스'인 항해자료기록기도 이 사고를 계기로 세계 첫 도입 됐다. 여객선 기관실을 이중으로 만들고, 두 기관실 사이를 격벽으로 막아 한쪽이 손상되더라도 운항이 가능케 했다. 비상 조타실을 만들고 전체 정전(停電)에 대비해 전기 설비를 구간별로 나눴으며 선내 설비·부품은 유효기간을 엄격히 지키게 한다. 해양학교의 안전 프로그램을 강화했고, 좌초 등 선박사고 시 인명을 구조하는 시뮬레이션도 상시 실시한다. 스웨덴 각 지방정부는 사고 생존자와 유족들의 심리 치료를 20년째 진행하고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2014년 7월 23일 수요일

    [한국일보] 얼굴 감싼 거장 "내 생에 마지막 추모 공연이길"

    얼굴 감싼 거장 "내 생에 마지막 추모 공연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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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공연을 앞두고 연 기자회견에서 백건우씨가 감정에 북받쳐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위쪽). 백씨는 “추모공연이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을 초대할 생각은 없다”며 “그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책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장병욱선임기자
    등록: 2014.07.1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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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위로 연주회 갖는 백건우씨

    "몰려오는 무력감 피할 수 없었다"
    회견장서 1분여 간 말 잊지 못해
    '비극의 시간' 반추하는 레퍼토리 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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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공연을 앞둔 피아니스트 백건우.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이런 음악회는 처음이다. 그 슬픔의 현장을, 파리에서 뉴스로 다 봤다. 순간 너무나 강한 감정이….” 공연을 준비하는 심정을 묻는 기자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전의 노장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어떤 감정이 북받쳐 올랐을까. 피아니스트 백건우(68)씨는 한동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1분여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진기자들의 플래쉬가 봇물처럼 터졌다. 15일 오후 3시 서울 장충단로 국립극장 안 레스토랑 해와달. ‘세월호 참사 100일 희생자 추모 공연, 백건우 영혼을 위한 소나타’ 기자 회견장의 시간은 잔인했다.
    “파리에서 부다페스트 공연 준비 중 참사를 알았다. 첫 뉴스를 듣고 너무나 화가 났다. 피할 수 있는 일인데 벌어졌다는 사실은 나를 무력감으로 몰아넣었다.” 제주방송(JIBS)측에서 위령의 뜻으로 음악회를 제안했고, 거장은 겁도 났지만 수락했다. “전례 없는 형식의 공연인 데다 물밀 듯 밀려드는 감정들을 통제할 수 있을지 우선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그는 자신의 무대에 예를 표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정성껏 준비한 거니 잘 들어 주세요.” 아끼는 소품들은 그의 못 다한 언어들이다. “소품들을 통해 (나의)괴로움을 하느님에 대한 질문으로 바꿔 허공이든, 바다이든 던지고 싶었다.” 고해 성사의 결과일까, “하느님을 통해 답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올린 곡들이 이번의 레퍼토리”라고 했다.
    “리스트의 ‘잠 못 이루는 밤, 질문과 답’은 참사 소식을 접하고 난 뒤, 나에게 들이닥친 고통을 그대로 말해줘요.” 리스트의 ‘침울한 곤돌라 2번’은 더하다. “곤돌라는 죽음을 상징하죠. 곡 말미 부분에 자욱한 허무감은 말없이 침묵하는 바다를 보는 듯 해요.”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곡을 이렇게 연주하게 될 줄 짐작 못 했으니 삶의 아이러니마저 닥친 듯 그는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라벨의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느’는 너무나 애처롭고 아름다워 이 역전의 노장을 더욱 착잡하게 만드는 듯 했다. “마치 죽은 아이들이 (그 곡을 통해)뭔가 말하려는 듯 해서….” 목은 다시 메인다. 그러나 리스트의 ‘순례의 해’의 마지막 곡 ‘힘을 내라’는 그가 살아남은 자들의 등을 토닥이는 메시지며, 맨 마지막 곡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죽음을 초월하는 강렬한 사랑”의 메시지를 이 시대에 전한다. 그가 맨 첫 곡으로 택한 작품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 중 제 2악장. 친근한 선율이 장차 이어질 비통한 음악적 사건을 여는 셈이다. 엄청난 비극으로 끝난 수학여행 유람선 세월호의 시간을 반추하듯.
    그는 “생애 처음인 추모 콘서트가 이번으로 마지막이기를 빈다”며 “그러나 결코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갖는 자리”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이런 일이 재발한다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17일~20일 관람 신청을 받는다. 모두 500석으로 제한돼 있다. (064)740-7810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경향신문] 구명조끼 끈 서로 묶은 채.. 함께 떠난 두 아이

    [단독]구명조끼 끈 서로 묶은 채.. 함께 떠난 두 아이남녀 학생 시신, 세월호 선체 내부에서 나란히 발견
    잠수사 “놀랍고 가슴 뭉클… 물속이지만 순간 눈물”
    경향신문|진도 | 배명재 기자입력 14.04.24 06:17 (수정 14.04.2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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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선체 내부에서 구명조끼 끈으로 서로를 묶은 남녀 고교생 시신 2구가 발견됐다. 이들은 발견 당시 뒤집힌 세월호 우현 통로 계단을 올려다보는 형태로 잠겨 있었다. 위, 아래로 각각 1개씩 달린 구명조끼 끈 가운데 위쪽 끈은 각자 허리에 묶었지만 아래쪽 끈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지난 22일 이들을 물속에서 처음 발견한 ㄱ씨(58)는 "어린 학생들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얼마나 무섭고 힘들고 괴로웠겠느냐"며 "나름대로 함께 공포에 맞서려고, 살려고 서로의 몸을 끈으로 묶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잠수경력 35년째인 ㄱ씨는 이날 5번이나 잠수했다. 수심 37m 바다에 동북 방향으로 비스듬히 뒤집혀 누워 있는 세월호에 갇힌 실종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3번째 잠수 때였다. "생존자 한 명이라도 찾아야겠다"며 거센 급물살에 빨랫줄처럼 날리는 몸을 가누며 5분여 만에 구명용 로프(라이프 라인) 끝부분에 어렵사리 멈췄다. 그 지점에서 그는 갖고 들어간 25m 로프를 잇는 작업을 하면서 수색 범위를 넓혀갔다.





    24일 이 기사를 읽고 경향신문 페이스북 페이지로 누리꾼 박지은씨가 보내준 그림

    ㄱ씨는 새 줄을 잡고 선체 오른쪽을 찾기 시작했다. '서치라이트'를 켰지만 시계는 30~40㎝에 불과했다.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도 잘 안 보일 정도였다. 더듬더듬 선체를 훑으며 30여분쯤 돌아다니다 선체 안으로 몸이 슬쩍 휩쓸려 들어갔다. 물 흐름이 잦아든 공간이 나왔다. 살펴보니 승객들이 다니는 통로였다. 위쪽에는 거꾸로 선 계단이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몸을 안쪽으로 돌리던 그때, 신발 두 짝이 눈에 들어왔다. 부유물을 모두 밀쳐내니 남학생 주검이 드러났다. 청바지 차림에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 이번 구조작업에서 만난 첫 시신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고인에 대한 예의를 표한 후, 시신 수습 관행대로 남학생을 밀어 배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길이 1m가량 되는 구명조끼 아래쪽 끈에 뭔가가 연결돼 있었다. 끈을 당기자 맨발 상태의 여학생 주검이 나타났다.

    ㄱ씨는 잠수 시간이 10여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두 사람을 한꺼번에 끌고 나가기에는 너무 무거워 연결된 끈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남학생을 먼저 배 밖으로 밀어낸 후 여학생을 데리고 나왔다.

    ㄱ씨는 "그 순간 일생에서 가장 놀랍고, 가슴 뭉클한 순간을 물속에서 맞이했다"고 전했다. 웬일인지 남학생 시신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보통 시신은 물속에서 떠오르게 마련"이라며 "'이 아이들이 떨어지기 싫어서 그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너무 가슴이 아팠고, 머리가 멍했다"며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 두 사람을 물속에 놓고 다시 수면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후배 잠수부들을 불렀다. 그들이 두 사람을 수습하는 사이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물속에서 본 장면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 '딸 잘 있지.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물속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줬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팽목항으로 옮겨진 두 사람의 주검은 가족들에 의해 제각각 안산으로 이송됐다. ㄱ씨는 "두 사람이 평안한 마음으로 떠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진도 | 배명재 기자 ninaplus@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