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그들이 야구장으로 간 까닭
[중앙일보] 입력 2014.04.16 00:02 / 수정 2014.04.16 00:02‘시간은 돈이다.’ 여기서 시간은 일하는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노는 시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원시시대의 시간이란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는 흔한 것이었죠. 하지만 현대사회에선 다릅니다 돈을 주고 사야할 만큼 희소하고 귀해졌습니다. 그렇다보니 가치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만 점점 사람이 몰립니다. 대형 유통회사가 야구장을 경쟁상대로 꼽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서로 물고 물리는 경쟁구도를 알아봤습니다. 시간을 누가 차지하느냐, 바로 그 사람이 소비자의 지갑도 차지하리니-.
오래 잡아두어라, 의미있게
“코카콜라 경쟁상대는 다른 음료수가 아니라 물이다. 우리가 음료업계 점유율 40%를 차지해 독보적 1위라지만 전체 물시장을 놓고 봤을 땐 3%밖에 되지 않는다. 우린 한참 멀었다.” 워렌 버핏이 꼽는 최고의 기업 중 하나, 바로 코카콜라다. 지금의 코카콜라가 있기까지는 1981~97년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던 로베르토 고이주에타 회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펩시와의 시장점유율 싸움에서 승리해 자만에 빠져있던 코카콜라를 흔들어 깨워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바로 위의 이런 통찰력으로 말이다.
이 회사 직원은 물론 소비자 대부분 코카콜라의 경쟁자는 펩시콜라라고 생각할 때 그는 판매하는 제품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니, 소비자가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토대로 경쟁업체가 누구인지 정확히 꿰뚫어봄으로써 코카콜라를 위대한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당시엔 고이주에타의 발상이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이제 이런 접근법은 꽤 보편적인 게 됐다. 스포츠용품업체 나이키의 경쟁업체가 게임기 회사 닌텐도라거나 유통업체의 경쟁상대가 테마파크라는 식으로 말이다. 더욱이 산업간 장벽이 무너지면서 경쟁구도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다.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실은 치열하게 경쟁하는 업종은 어떤 게 있을까. 그리고 그런 경쟁의 먹이사슬의 최정점엔 어떤 업종이 자리잡고 있을까.
화장품의 경쟁상대가 맛집이라고?
최근 화장품 업계가 전반적으로 얼굴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백화점 등에서 판매하는 고가(高價) 화장품 브랜드는 저가(低價) 브랜드 공세에 매출이 휘청하고, 저가 브랜드는 살아남기 위해 연일 할인에 할인을 거듭하다보니 남는 게 없다고 아우성이다. 업계 내에 경쟁 브랜드가 너무 많아 레드오션이 된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화장품 업계 관계자들은 위협적인 경쟁자로 서로 다른 화장품 브랜드를 꼽지 않았다. 예를 들어 김인애 에스티 로더 부장은 경쟁자로 샤넬이나 랑콤 대신 맛집이란 답을 했다. 값비싼 영양 크림 하나 살 돈으로 차라리 서비스 좋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등 소비 행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란다.
소비자는 이렇게 매 선택의 순간마다 내 욕구를 가장 충실히 충족시켜주는 곳에 돈을 쓴다. 사실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마케팅 이론가인 하버드 경영대 테오도르 레빗 교수는 일찍이 1975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 ‘마케팅 근시안’(Marketing Myopia)에 관해 썼는데, 핵심내용은 소비자의 요구(needs)와 욕구(wants) 위주로 경쟁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결국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면 어떤 업종도 서로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2014년을 살아가는 한국 소비자의 요구와 욕구는 누가 누구와 경쟁하며 가장 효율적으로 채워주고 있는 걸까. 아니, 대체 어떤 욕구가 있는 걸까.
마켓 셰어를 넘어 라이프 셰어로
제일기획은 최근 중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바로 라이프 셰어(life share)다. 간단히 설명하면 소비자 일상을 공유하는 모든 게 시장에서의 경쟁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에 같은 업종 제품간 경쟁을 넘어 소비자가 같은 시간이나 상황에서 사용하는 모든 게 경쟁자라는 개념이다.
김미경 제일기획 어넬리틱스팀 박사는 “기존 시장 안에서 우리 회사 제품 몫을 늘리는 마켓 셰어(시장 점유율·market share) 시대에서 소비자 마음에 우리 회사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마인드 셰어(mind share)를 넘어 이제는 라이프 셰어(life share)가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예컨대 주말 오후를 보내기 위해 집에서 TV를 볼 지, 외식을 할지, 아니면 야외로 나가 캠핑을 할지, 아니면 테마파크에 갈지, 선택의 폭은 넓지만 결국 고를 수 있는 건 한가지 밖에 없다. 그러니 TV나 외식·캠핑·테마파크 등이 모두 경쟁자인 셈이다. 레빗 교수의 말대로 내가 공급하는 제품이 무엇이냐보다는 소비자가 뭘 원하느냐에 초점을 맞춰 경쟁자를 찾아야 하는 이유다.
국내 업체들도 이미 몇년전부터 이런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2011년 “이제 다른 유통업체와 시장점유율 경쟁을 하는 데서 벗어나 테마파크나 야구장과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심 밖 명품 아웃렛 매장은 이런 인식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런가하면 프로야구단 SK 와이번스는 2007년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비약적인 관객 증가 효과를 누리기도 했다. 홈구장인 문학구장의 경쟁상대를 잠실구장이나 사직구장이 아닌 CGV·메가박스 같은 영화관과 에버랜드 같은 테마파크로 설정한 게 주효한 거다. 2009년 리모델링한 인천 문학구장은 단순히 야구 경기장이 아니라 나들이 문화를 선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고 2006년 30만명에 불과했던 관람객수는 2012년에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 구장엔 바비큐존 등이 있어 가족들이 피크닉 온 기분으로 고기를 구어먹을 수도 있다.
미 경제 칼럼니스트 케빈 매이니는 『트레이드 오프』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충실성과 편의성을 저울질하며 선택을 한다고 했다. 충실성이란 그 선택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양질의 경험, 편의성은 말 그대로 편리함을 뜻한다. 김상범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수고를 무릅쓰고 굳이 야구장에 가는 건 단순히 야구 경기 결과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라며 “집에서 TV로 관람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게 바로 매이니가 말하는 충실성이고, 점점 사람들은 충실성이 높은 경험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케아가 위협적인 이유
이케아(IKEA)의 한국 진출이 가구업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상당한 파장을 끼치는 것도 사람들이 이젠 전보다 충실성 높은 경험을 원한다는 데 있다. 이케아가 바로 소비자의 그런 욕구를 정확히 충족시켜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케아는 단순한 가구업체가 아니다. 더더욱이 값싸고 귀찮은 DIY업체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전세계 어디든 이케아 매장을 가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케아는 가구 살 생각 없어도 그냥 미트볼 먹으러도 놀러갈 수 있는 곳이다. 웬만한 곳은 매장이 워낙 크기도 하지만 가구에,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에, 게다가 값싸고 맛있는 미트볼로 이케아는 하루 종일 고객을 잡아둔다. 이케아가 그러란다고 누가 그 말을 듣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들 자발적으로 이케아에 머무는 건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그만큼 양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케아의 한 홍보 담당자는 “이케아는 체험형 매장이라 일부 테마파크 등에서 우리를 경쟁상대로 꼽는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한국에선 아직 매장을 열지 않아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이케아가 단순히 가구업체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판매 제품군으로만 보면 가구업체 뿐 아니라 다양한 가정용 소품을 파는 대형 할인매장이 직접적인 경쟁상대”라고 말했다.
가구업체의 경쟁자는 가구업체, 식의 정형화한 경쟁관계 대신 새로운 경쟁상대가 나타나는 것은 기존 시장 안에서의 경쟁이 치열해져 시장 범위를 확대하려는 기업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김건하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는 “새로운 경쟁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산업 간 장벽이 허물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게 가능한 건 사람들이 물건을 사거나 혹은 어떤 행위를 할 때 한 가지만이 아니라 다른 대체재도 함께 고려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마이클 포터 교수는 경쟁의 다섯가지 측면 중 하나로 ‘대체재와의 경쟁’을 꼽기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쟁구도
앞서 언급한대로 화장품 업계는 경쟁자로 맛집(외식업)을 꼽았다. 그렇다면 맛집 역시 화장품을 경쟁자로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임종욱 CJ푸드빌 과장은 “외식업은 일단 집 밖에 나와서 돈을 지불하고 음식을 먹는다는 점에서 캠핑이 경쟁자”라고 말했다. 둘 다 똑같이 야외에 나가서 음식을 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캠핑업체는 외식업을 전혀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캠핑업체 콜맨은 집밖에서 즐기는 모든 엔터테인먼트, 즉 영화관·테마파크·대형마트·야구장을 다 꼽았다. 콜맨 마케팅팀 허재성 차장은 “캠핑에서 해먹는 음식은 야외라는 공간에다 직접 해먹는 재미가 있어 단순히 사먹는 음식으로 대체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영화관이나 테마파크 등은 “캠핑과 마찬가지로 가족이나 친구끼리 함께 즐기는 복합적인 활동”이라 경쟁자로 봤다.
그렇다면 영화관은 어떨까. 캠핑과 함께 테마파크·야구장을 더 꼽았다. 조성진 CGV 홍보팀장은 “문화 콘텐트를 갖고 사람을 많이 모으는 곳이라면 다 경쟁자”라고 했다. 메가박스 측도 캠핑 등 아웃도어 활동을 주된 경쟁자로 꼽았다.
테마파크에겐 복합쇼핑몰이 새로운 경쟁상대였다. 롯데월드 홍보팀 양기승씨는 “다양한 문화를 한곳에서 경험하는 몰링(malling) 문화가 경쟁상대”라며 “복합쇼핑몰에서도 쇼핑과 식사·영화·공연 등 테마파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쟁 사슬의 마지막에는 뭐가 있을까. 바로 야구장이다. 유통업체는 물론 영화관·캠핑업체가 동시에 야구장을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로 꼽았다. 그렇다면 야구장에겐 누가 경쟁자일까. SK 와이번스 김성용 홍보팀 매니저는 “결국 시간점유율 싸움”이라며 “3시간 여유가 있을 때 사람들은 야구장에 갈지, 테마파크에 갈지, 영화관에 갈지를 선택한다”며 “볼거리가 있고 체험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테마파크가 경쟁자”라고 설명했다.
야구장에 왜 열광할까
야구장이 경쟁 사슬의 마지막에 놓였다는 건 최근의 야구 열기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야구장 관람은 이제 하나의 놀이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야구장을 찾는 사람도 점점 늘고 있다. 2000년엔 연간 관람객이 250만명이었는데 지난해엔 644만명이었다. 경기당 평균 관객수로는 4713명(2000년)에서 1만1184명(2013년)으로 늘었다.
야구 자체의 묘미도 있다.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은 “한국만의 독특한 응원문화가 사람들을 야구장으로 몰리게 한다”며 “세상에서 가장 큰 노래방”이라고 말했다. 그는 “야구장에서 3만명 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부산 갈매기’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유명한 응원가를 부르는 광경은 정말 재미있고 놀라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야구장은 완급 있는 놀이문화”라고 했다. 영화관은 집중해서 영화만 봐야 하고 캠핑장은 대화가 끊기면 분위기가 자칫 썰렁해진다. 하지만 야구장은 대화를 나누다 경기를 볼 수도, 또 경기에 빠져 있다가도 경기 내용에 따라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하다는 거다.
어떤 기업이든 결국 관건은 소비자의 시간과 호감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야구장이 국내 많은 다른 업종의 경쟁자로 꼽혔다는 건 어쩌면 단순한 스포츠 업종이 아니라 서비스업종이자 콘텐트 산업인 미 프로야구(MLB)나 영국 프로축구(EPL)의 반열에 올랐다는 얘기가 아닐까.
안혜리·윤경희·전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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