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조선일보] 에스토니아호 침몰 20년... 스웨덴 국왕 "갈등 겪었지만 화합 일깨운 세월"

에스토니아號(스웨덴·에스토니아가 공동 운항했던 여객선) 침몰 20년… 스웨덴國王 "갈등 겪었지만 화합 일깨운 세월"

  • 파리=이성훈 특파원 
  • 양모듬 기자 
  • 이순흥 기자
  • 입력 : 2014.09.30 02:57

    [852명 희생된 '北유럽의 해상 참사'… 길고 길었던 事後 수습]

    - 사고 현장… '수중 무덤'으로
    스웨덴, 인양 비용 치솟자 水葬… 증거 부족으로 1명도 기소 못해
    유족 분노 들끓었지만 각계 원로로 구성된 '윤리委' 통해 여론 수렴하며 유족 설득

    - 재발 방지 노력 '현재 진행형'
    사고 위험 높은 로로船 단계 폐지, 선박용 블랙박스 세계 첫 도입
    기관실 이중으로 제작… 최악 대비

    세월호 침몰 사고가 30일 168일째를 맞는다. 그 후 사고 수습은 상처를 치유하기도 했지만 예상 못 한 커다란 갈등을 만들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29일 "한국을 단결시켰던 세월호 사고가 지금은 한국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20년 전인 1994년 9월 28일 북유럽 발트해에서 선박 사고가 일어났다. 에스토니아를 떠나 스웨덴으로 향하던 에스토니아호(號)가 폭풍에 침몰해 17개국 852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세월호를 능가하는 참사였다. 이익에 집착해 악천후에 출항을 강행한 점, 화물을 대충 실은 안전불감증 등 사고 원인도 비슷했다. 승객을 버린 승무원의 비열함은 도를 넘었다. 생존자 137명 중 3분의 1이 승무원이었다. 여성 승객 97%가 숨졌고, 12세 이하 어린이 승객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에스토니아호의 피해 당사국·당사자들은 어떤 20년을 보냈을까. 인내하고 양보하면서 성숙하게 사고를 수습했을까, 아니면 우리처럼 갈등하고 갈라졌을까.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이 28일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 20주년 추모식이 열린 스웨덴 스톡홀름 희생자 추모비 앞에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1994년 침몰 사고 당시 전체 탑승 989명 중 852명이 사망했다. 스웨덴은 자국민 501명이 사망, 피해국 중 인명 피해가 가장 컸다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이 28일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 20주년 추모식이 열린 스웨덴 스톡홀름 희생자 추모비 앞에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1994년 침몰 사고 당시 전체 탑승 989명 중 852명이 사망했다. 스웨덴은 자국민 501명이 사망, 피해국 중 인명 피해가 가장 컸다. /AP 뉴시스
    지난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에스토니아호 침몰 기념공원. 852명의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벽 앞에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68)가 꽃다발을 바치고 묵념했다. 유럽 17개국에서 몰려든 유족 대표들도 고개를 숙였다. 20년 전 사고로 501명의 국민을 잃은 스웨덴의 국왕은 "에스토니아호 침몰은 스웨덴에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지만, 공동체와 화합의 필요성도 일깨워주었다"며 "제가 할 일은 국민을 위로하고 단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에스토니아호 희생자 852명 대부분은 아직 핀란드 해저(海底)에 잠들어 있다. 스웨덴 정부는 선체 인양과 실종자 수색을 포기하고 사고 현장에 자갈 수천t을 붓고 콘크리트 막을 씌워 '수중 무덤'을 만들었다.

    보고서 내는 데만 3년

    에스토니아호 사고는 책임 소재만 4개국에 얽힌 고차(高次) 방정식이었다. '독일산(産) 여객선을 에스토니아 해운사가 스웨덴 감독하에 핀란드 해역에서 운항'하다 난 사고였기 때문이다. 다국적 사고조사위원회가 바로 다음 날 꾸려졌지만 국가 간 증거 전쟁과 감정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침몰 이후에야 객실 방송을 한 뒤 구조대가 오자 먼저 탈출한 에스토니아 선원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스웨덴엔 공동운영 책임자로서의 관리 부실이, 핀란드 해경(海警)에는 미숙한 초동대처에 대한 질책이 나왔다. "배의 외벽이 약했다"는 지적으로 20년 전 에스토니아호를 건조한 독일 기업에도 화살이 돌아갔다.
    
 스웨덴 에스토니아호 이후 이렇게 바뀌었다 정리 표
    수습 과정에서 스웨덴 당국도 우왕좌왕했다. 사고 초반 구조자가 훨씬 많은 것으로 잘못 집계했다가 유족들을 허탈하게 만들었고, 언론들은 희생자 여권 사진을 가져다 공개하는 등 무분별한 보도 경쟁을 벌였다. 여야 정치권은 유족을 달래려 "돈이 얼마가 들든 무조건 선체를 인양하겠다"고 덜컥 약속했다가, 결국 비용이 치솟자 번복하고 '수장(水葬)' 카드를 내밀면서 또 폭풍을 겪어야 했다.

    증거도 水葬… 기소자 '0'

    이런 혼란과 갈등 속에서 최종 보고서는 3년 뒤인 1997년에야 나왔다. 모두가 기다린 보고서의 결론은 "선체 결함과 자연재해, 관리부실, 구조 미흡 등 모든 요소가 복합된 사고"라는 것뿐이었다. 수사를 맡았던 스웨덴 검찰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선장을 포함해 관계자 중 단 한 명도 기소하지 못했다. 모두에게 책임을 돌리다 보니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어렵게 된 것이다. 에스토니아호는 사실상 미제(未濟) 사건이 되고 있었다.

    격분한 스웨덴의 유가족들은 선주(船主)나 조선업체, 운항사협회에게 화살을 돌리고 배상을 요구했다. 정부와 검찰을 믿지 못한 일부 유가족은 단독 조사에 착수하거나, 제3국에 "독립적인 전문가 그룹이 투명한 절차에 따라 재조사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결정적 증거'인 선체 자체가 수장된 상황에서 남은 것은 유족들의 절규와 각국과 보험사가 얽힌 책임 공방, 일부 과격 세력이 양산한 음모론만이 남게 됐다.

    유족들 아픔 묵묵히 달래

    시간이 지나며 유족 대부분은 현실을 인정하고 보험사가 제시한 보상금을 받아들였다. 스웨덴에서 통상 해양사고 1건당 지급되던 평균 금액 2억6000만 크로네(377억원)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웨덴 정부가 초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는 실패했지만, 묵묵히 국민 마음의 상처를 달래려 노력했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대신 중립적인 각계 원로로 윤리위원회를 꾸려 여론을 수렴했다. 1995년 수중 무덤을 만들 때도 인양을 원하는 유족을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희생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고지역 접근금지' 국제조약까지 마련했다.

    선박 구조부터 해양법까지 손질

    이후 스웨덴은 해양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안전 선박 도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제해사기구(IMO)를 통해 사고 위험이 높은 로로선(승객과 화물을 함께 싣는 선박) 운항을 단계적으로 폐지했다. '선박용 블랙박스'인 항해자료기록기도 이 사고를 계기로 세계 첫 도입 됐다. 여객선 기관실을 이중으로 만들고, 두 기관실 사이를 격벽으로 막아 한쪽이 손상되더라도 운항이 가능케 했다. 비상 조타실을 만들고 전체 정전(停電)에 대비해 전기 설비를 구간별로 나눴으며 선내 설비·부품은 유효기간을 엄격히 지키게 한다. 해양학교의 안전 프로그램을 강화했고, 좌초 등 선박사고 시 인명을 구조하는 시뮬레이션도 상시 실시한다. 스웨덴 각 지방정부는 사고 생존자와 유족들의 심리 치료를 20년째 진행하고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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