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허핑턴포스트] 역사상 가장 기이한 행위예술 20

역사상 가장 기이한 행위예술 20

게시됨: 업데이트됨: 
행위예술은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재기에 성공했다.
물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오스카 슐레머, 존 케이지, 스튜어트 셔먼(Stuart Sherman) 같은 예술가들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연극, 무용, 음악, 시, 사회운동과 같은 요소를 현대미술에 접목하고 있었다. 70년대에 와서 이 장르는 액션(Action) 예술가들과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 예술가에 힘입어 예술가와 관객의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정점에 도달하기도 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자해로 관객을 놀라게 했고, 비토 아콘치는 자신의 자위행위를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후에는 로리 앤더슨, 매튜 바니, 그리고 요코 오노 같은 베테랑들이 행위예술 장르의 트렌드를 유지했다. 이바와 에델(Eva & Adele), 길버트와 조지, 제네시스 브라이어 포리지(Genesis Bryer P-Orridge) 같은 예술인들은 하루하루를 행위 예술가처럼 살았다. 2000년대가 되자 주류논객과 예술후원자들는 적극적으로 행위예술의 트렌드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또 크리스찬 마클레이, 라이언 트레카틴, 스파터커스 체트윈드(Spartucus Chetwynd)는주류 미술관, 국제 미술 행사, 인터넷을 통해 행위예술을 전파했다. 지난 몇 년 간 아브라모비치는 배우 제임스 프랭코나 가수 레이디 가가와 협업해 예술을 거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제는 아브라모비치가 잠자고, 응시하고, 벌거벗는 괴이함을 온 세상이 즐기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아방가르드하고 절제되지 않은 예술이 대중문화에 스며들자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걸 왜 예술이라고 부를까?"
이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당신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 20개의 행위예술을 모았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은 놀랍고, 거칠고, 잔인하고, 모욕적이고, 정말로 괴상망측해서 일반 대중이든 전문가든 다 머리를 긁적거리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허핑턴포스트는 미술사에 등장한 아래의 작품 중 어느 것이 가치가 있고 없는지 '받아들일까?/말까?' 식의 채점을 매겼다.
1. 비토 아콘치의 '모판(Seedbed)'
비토 아콘치는 1972년 뉴욕 소나밴드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행위예술을 펼쳤다. 갤러리 나무 바닥 아래의 좁은 은신처에 숨어 들어가 자위행위를, 그것도 갤러리를 방문한 관객들의 발자국을 들으며 자신의 성적 환상을 유발했다. 또 이 때의 생각을 마이크로 온 갤러리에 방송했다.
예상했겠지만 매우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난 성적인 요소보다 광의의 예술행위라고 평가받고 있다. 2002년 영국 가디언지의 조나단 존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아콘치가 연기한 인물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미국 영화의 주인공, 영화 '컨버세이션(1974)'의 진 핵크만이나 '택시 드라이버(1976)'의 로버트 드 니로 처럼 피해망상과 분열증을 앓는 캐릭터였다."
'받아들일까?/말까?' 받아들이자. 여성 혐오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한 편으론 자극적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관음적이다. 그러나 아콘치는 2006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모판'을 공연할 때는 남녀 평등론에 대한 글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그래서 내 작품은 거의 최고의 웃음거리이자 만화 캐릭터 같은 역할이었다. 나중에 빵 터지는 그런 캐릭터 말이다." 우리는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이 이 작품을 설명한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70년대의 가장 중요한 라이브 행위예술 중 하나."
2. 마르니 코탁의 실제 출산 행위예술
marni kotak
마르니 코탁은 2011년 '아기 X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지속적인 전시를 열었다. 건강한 남자 아기를 출산하는 과정을 기록의 형식으로 보여줬다. 그녀는 이를 가능하게 하려고 집에 '현미경 갤러리(Microscope Gallery)'를 설치하고 관객과 임산부 도우미에게 출산과정을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아기X의 탄생축하 선물인 3m짜리 트로피를 포함해 출산 기념품들을 갤러리에 모았다.
코탁의 행위예술은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녀가 "아들 아약스(Ajax)를 양육하는 자신의 모습을 재-개념화하여 평생의 행위예술로 전환하려고 한다"고 보도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일부에서는 코탁의 아기의 양육을 행위예술로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가 인터넷상의 '엄마 블로거'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질문한다. 흥미로운 문제이긴 하나 중요한 건 '아기 X' 프로젝트로 인해 아약스가 작품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가 위험했을 가능성은 적지만, 아이를 상업적인 미술 세계에서 하나의 도구로 이용한 것만은 확실하다.
3. 와파 비랄(Wafaa Bilal)의 내장 카메라
wafaa bilal
이라크 태생이자 뉴욕대학교 교수 겸 예술가인 와파 비랄은 2010년 일 년간의 자체 감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자 뒤통수에다 카메라를 내장하는 수술을 했다. 과거 자신의 난민생활이 영감이 되어 60초마다 '3rdi'라고 불리는 카메라로 자신의 뇌 속을 촬영하고 그 이미지를 인터넷에 게시했다. 일종의 매일 무언가를 '남기는' 행위였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자신이 우리가 무시하는 사회의 문제를 거울에 반영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우리가 당면하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상황들을 표현하는 거다. 이런 프로젝트는 감시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는데 그 뜻이 있다."고 전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왜냐면 비랄의 몸이 두개골에 박은 카메라의 티타늄 소재 부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비랄의 '잿더미 시리즈(Ashes Series)'가 훨씬 더 좋은 작품이다.
4. 아브라함 푸앙슈발(Abraham Poincheval). 죽은 곰의 뱃속에서 2주 동안 산 남자.
bear
프랑스 행위예술가 아브라함 푸앙슈발의 2014년 작품은 단순했다. 죽은 곰의 뱃속에서 2주간 동안 자는 것이었다. 이 행위예술은 '프랑스의 사냥과 자연 박물관'에서 연출됐는데, 소량의 음식과 물(물론 조명, 쿠션, 읽을거리와 조그만 주전자와 일종의 변기를 포함)만으로 속을 파낸 곰의 뱃속에서 2주 동안 생활하는 모습을 인터넷으로 생방송했다.
좁은 공간에서 지내느라 밀실 공포증이 생겼을지도 모르지만, 사진과 비디오에는 그냥 한 남자가 정작 곰의 내부는 보이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쉬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 자신의 육체적 한계까지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이를 계속 관람할 절실한 이유가 뭐냐는 말이다.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박제 동물 안에 자신을 가둔 행위가 굉장히 힘들었겠지만, 코미디 영화 '에이스 벤츄라2'에 나오는 괴이한 장면들이 떠오른다.
5. 아드리안 파슨스(Adrian Parson)의 라이브 포경 수술
surgery
지난 2007년 행위예술가 아드리언 파슨스는 무대에서 녹슨 스위스 군용 칼로 직접 포경 수술을 시도했다. 그리고 잘라낸 포피를 벽에 미리 만들어 놓은 구멍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파슨스는 "어떻게 보면 직접적인 방법으로 갤러리와 관객들을 관통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생물적인 파편이 되고 싶었으니까."라고 허핑턴포스트에 설명했다. 작품의 제목이 바로 '파편(Shrapnel)'이다.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우리는 그렇게 비위가 좋은 사람은 아니니.
6. 레이첼 매이슨(Rachel Mason)의 미래 광대(FutureClown)
정치의식이 강한 행위예술가 레이첼 매이슨은 랜드 폴(미 공화당 의원)의 악명 높은 의사진행방해(무려 13시간에 걸친)를 재연하기로 했다. 다만 현대미술에 걸맞게 자신의 제2의 자아인 괴상한 '미래 광대'의 모습으로 연기했다.
매이슨은 "랜드의 13시간에 걸친 의사진행방해를 뉴스를 통해 들었다. 그 순간 뭔가 와 닿는 느낌이었다."며 "저도 많은 연기를 하는데 장시간을 걸쳐 그렇게 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래서 그가 한 일이 정말 장대한 연기가 지속되는 기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좀 이상하지만, 미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거투루드 스타인의 소설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라고 허핑턴포스트에 전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받아들이자! 랜드 폴의 의사진행방해보다 나은 것이(거의 모든 것이지만) 뭐가 있겠나!
7. 클레이튼 데이비드 페티트(Clayton David Pettet)의 '미술 학교가 내 동정을 훔쳐갔다.'
five
Achieving Narcissism, 2013, Performance 18:00 mins, Clayton Pettet
2013년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미술대학에 다니는 페티트는 갤러리의 관객 앞에서 익명의 남자와 성행위를 연출하겠다고 선포해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미술 학교가 내 동정을 훔쳐갔다'는 제목의 작품은 작가가 16살 때 동정에 대해 가졌던 의문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정작 행위예술의 결과는 관객이 예상한 것과 전혀 딴판이었다.
120명의 관객은 페티트의 첫 '성' 행위 관람 대신 바나나를 연기자의 입에 '삽입'하는 행위를 봤기 때문이다. 페티트는 영국 패션 잡지 데이즈드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관객들은 전혀 다른 걸 기대했나 봐요. 뭘 원했는지 알겠죠?"라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바란 건 예술작품이 아니라 제가 성행위를 하는 걸 보는 것이었죠. 정말로 그들이 예술적 가치를 생각하고 방문했다면 미리 눈치를 채고 그렇게 실망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동정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관찰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적어도 그렇길 바란다.
8. 론 애티(Ron Athey)의 썩지 않는 육체
애티는 1996년부터 '썩지 않는 육체' 시리즈를 시작했다. 2014년 버전은 이렇게 구성된다. 하나, 예술가는 쇠 탁자 위에 벌거벗은 무서운 시체처럼 결박상태로 누워있다. 둘, 핀으로 눈꺼풀을 뒤로 젖히고 야구방망이를 자신의 항문에 삽입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하얀 거품 같은 물질로 자신에게 '성유를 바르듯' 발라달라고 요구한다.
그레이스 미술관(Grace Exhibition Space)에 의하면 애티와 그의 협업자들은 "옛 성인들의 삶과 유물 그리고 특히 시체가 내장된 밀랍 조각품인 '썩지 않는 육체'에 대해 연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HIV에 감염된 자신의 상태와 어릴 때 펜테코스트파(성령의 힘을 강조하는 기독교 교파) 교회에서 겪은 일들을 '썩지 않는 육체'로 나타냈다.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죽음에 대한 섬뜩한 견해를 보여주지만 역사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우상 파괴자가 좋아할 작품이다.
9. 밀로 모이레(Milo Moire)의 '낳은 달걀로 그리기'
어떤 예술가는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해 창작을 한다. 또한 보수가 없고 또 있다 해도 고통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단지 고통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분만의 고통일 때는 더 그렇다. 2014년에 발표한 '낳은 달걀로 그리기' 작품을 보면 스위스 작가 모이레가 확실하게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벌거벗고 자신의 질 속에 넣은 페인트를 달걀을 캔버스 위로 떨어뜨린다. 그 유명한 잭슨 폴록의 표현주의 예술을 더 새롭고, 더 벌거벗은 채 창조했다.
비디오에는 "낳은 달걀로 그리기를 생각하면 몇 가지 연결되는 것들이 떠오른다. 예를 들면 창작에 대한 불안, 가벼운 개념의 상징적인 힘, 그리고 여성 안에 있는 창조의 힘."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명상적인 예술을 연출한 후, 캔버스를 접고 다시 펼치면 놀라운 대칭 그림을 볼 수 있다."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모이어가 자신의 나체를 편리한 예술 도구로 이용하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작품은 명상적이면서도 여성의 창조력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런데 뭔가 잘못된 부활절 축제 느낌이다. 더군다나 이 행위예술이 독일 아트페어 아트 쾰른(Art Cologne) 야외행사에서 선보였다는 것도 유감스럽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폭등하는 미술품 가격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 모이레의 예술 '놀이'를 제대로 감상할 상황이 아니었다.
10. 캐롤리 슈니먼(Carolee Schneemann)의 '육체의 환희(Meat Joy)'
1964년 슈니먼의 '육체의 환희'에서는 속옷만 입은 여자와 남자 8명이 노래에 따라 정해진 안무를 한다. 그리고 무대 위에 쏟아진 페인트, 종이, 엄청난 분량의 생고기 위에 몸을 비벼댄다. 이 작품은 파리에서의 '첫 번째 표현의 자유 페스티벌(First Festival of Free Expression'에서 선보인 후 뉴욕과 런던에서도 시행했다. 당시 작품에 대한 평은 관능적인 동시에 일종의 역겨운 성적 의식이라는 것이었다.
슈니먼은 "육체의 환희에는 아주 강렬한 생동감이 있다. 이 작품은 육체적이고 강렬하며, 즉흥적인 접촉과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하다."며"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서 더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고 허핑턴포스트에 전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받아들이자. 슈니먼은 페미니스트 예술의 개척자이자 잔혹한 성적 취향은 예술가 폴 매카시를 능가한다. 그녀는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제 작품이 충격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며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늘 이런 말을 한다. '이것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문화는 이런 걸 놓쳤음을 깨달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1. 캐시 젠킨스의 '내 자궁으로부터의 뜨개질'
자신을 '크래피티비스트(Craftivist=craft+activism, 공예와 행동주의의 결합) 라 부르는 캐시 젠킨스는 2013년 자신의 질 안에 있는 실로 뜨개질을 해 행위예술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호주 출신인 젠킨스는 비디오에서 "제 질 속에 집어넣은 실 뭉치로 28일 동안 뜨개질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매일 새로운 실 뭉치를 질 속에 넣은 다음 실을 다시 연결해 뜨개질합니다."
'자궁으로부터의 뜨개질'이라고 불린 이 작품은 트위터상에서 온갖 재밌고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받아들일까?/말까?' 받아들이자. 유쾌할 정도로 과격한 크래피티비스트라는 장르를 책임감 있게(생리 때도 계속 뜨개질을 했다) 소화해 낸 젠킨스에게 감사를!
12. 틸다 스윈튼의 모마(MoMA,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의 낮잠
2013년 배우 틸다 스윈턴은 모마에 갑자기 와서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가 몇 번 낮잠을 잤다. '아마도(Maybe)'라는 제목의 작품은 사실 1995년쯤 스윈턴이 이미 했던 퍼포먼스를 재연한 것이었다. 사실 좀 시시했다.
모마측의 설명은 "'모마에서 '아마도' 재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예상된 일정이나 예술가의 작품 설명, 미술관의 설명 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지나 다른 홍보물도 없다. 관객은 우연히, 실시간으로 작품을 체험하게 되는 거다. 지금 볼 수도,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1990년도 쯤이면 몰라도 SNS로 유명인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이 작품은 맞지 않는 것 같다.
13.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의 난교와 신비의 극장(Orgien Mysterien Theater)
니치는 종교적 차원에서 제물을 도살하는 것부터 가짜로 십자가에 못 박음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컬트(사이비 종교 집단) 선동가'이자 '비엔나 액셔니즘(1960년대부터 작품경향이나 주제가 비슷한 액션을 만들어낸 빈 미술가들)의 교황'이라고 불렸다. 그는 피를 마시거나 폭음을 하는 이교도적 의식에 관객의 참여를 강요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현시점에서 봤을 때 니치의 예술은 폭력을 미화하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당신이 영혼의 깊이를 더 알고자 하는 액셔니스트를 좋아하든지 말든 지 말이다.
14. 드보라 드로베르티스(Deborah de Robertis)의 '기원의 거울'
이 작품은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대담하고 노골적인 여성의 음부를 묘사한 작품)'에 대한 오마주다. 룩셈부르크 작가 드로베르티스는 2차원의 평면적인 명작을 행위예술로 바꿨다. 드로베르티스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1866년 작 '세상의 기원' 앞에 앉아 자신의 '세상의 기원'을 드러냈다.
그녀는 곧장 경찰에 끌려갔지만(사전에 미술관에 자신의 성기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보게 될 거라고 알리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예술적 의도는 알린 셈이었다.
드로베르티스는 룩셈부르크 워트(Luxemburg Wort)지에 "어떤 맥락에서 행해졌는지를 무시한다면 제 작품을 노출행위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제 작품은 충동적이지 않다."며 "미술사에는 빈 곳이 있는데, 사물을 응시하는 관점이 빠져 있다. 나는 내 질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질의 구멍, 숨겨진 검은 구멍, 그 깊은 빈틈, 육체를 초월해 무한에 닿는 기원의 기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받아들일까?/말까?' 받아들이자. 영상을 보면 작품을 본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들린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15. 쥬 유(Zhu Yu)
2000년 중국 예술가 쥬유는 의대에서 빼돌린 것처럼 보이는 죽은 태아를 직접 먹는 장면을 영상으로 남겼다. 이 작품은 아이 웨이웨이와 펭 보이(Feng Boyi)가 주최한 시끌벅적한 행사, 'Fuck Off'에서 선보였다. 영국의 채널 4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진짜 인간 태아가 아니었다.)를 본 평론가들은 일부러 충격을 자아내려고 한 행위예술이라고 비난했다.
주유는 동영상에서 "어느 종교도 인육을 금지하지 않는다."며 "그리고 어느 법도 다른 사람을 먹는 것을 금지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사회의 도덕성과 법의 중간 지대를 이용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말자.
16. 앨리자 쉬바르츠(Aliza Shvarts)
18949
앨리자 쉬바르츠
2008년 예일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쉬바르츠는 인공수정으로 임신하고, 9개월 내내 낙태약을 복용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식으로 기록했다. 비디오에는 낙태장면과 피가 나온다.
쉬바르츠는 예일대 신문에 "지난 1년간 여러 차례 직접 낙태를 유도했다."며 "임신할 수 있도록 받은 지 30분이 안 되는 정액을 주사기로 내 음부에 투입했다. 그리고 내 월경 주기 28일째가 되는 날 낙태를 유도하는 약을 먹었다. 그래서 심한 생리통과 출혈이 있었다. 낙태로 추정되는 시점과 생리 날짜가 일치하기 때문에 수정란이 생겼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기재했다.
또한 "나와 나를 보는 관객에게 임신의 현실은 어떻게 작품을 이해하느냐에 달렸다."고 추가 설명했다.
예일대학교는 그녀의 이런 행위예술을 '꾸며낸 소설'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쉬바르츠가 자신의 작품은 '대학의 승인을 받은' 작품이라고 주장하자 대학 측에서는 그녀의 그 말 자체도 '작품의 일부'라고 단정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낙태를 진짜 했건 말건 받아들이지 말자. 그녀의 의도가 정치와 이념에 대한 '질문을 유발'시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매체에서 논란만 일으켰다. 그녀가 뉴욕대학교의 행위예술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니 재능은 충분히 갖추었다고 볼 수 있겠다.
17. 프랭랭코 비(Franko B)의 '나는 네가 그립다(I Miss You)'
이탈리아 예술가 프랭코 비는 2003년 작 '나는 네가 그립다'를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나체를 흰색 페인트로 칠한 다음, 팔목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이 상태로 런던 테이트미술관 무대를 걷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메트로지에 "나는 응접실에 걸릴 만한 예술은 하지 않는다"며 "관객에게 와 닿아서 기억에 남는 작품을 추구한다. 예술이란 언어와 기억을 만든다. 언어는 당신을 감염시킬 수 있다. 나는 언어의 그런 점을 사랑한다."고 전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받아들이자. 그는 현대미술을 찾아오는 관객의 기대치에 적절한 일종의 패션쇼를 선보였다. 피와 나체 그리고 충격을 겸비한 그런 작품말이다. 이 작품 이후의 테이트 미술관은 아마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18. 보이나(Voina)의 공공장소에서의 난교(Orgy)
voina
반 푸틴 시위를 벌인 러시아의 여성 펑크록 밴드 푸시 라이엇(Pussy Riot)이 있기 전, 보이나(러시아 어로 전쟁이라는 뜻)라는 과격한 길거리 예술가 단체가 있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기반을 둔 이들은 러시아의 강압적인 체제를 반대하는 공공시위를 벌였다. 작품은 차가 지나가는 다리 위에 대형 성기를 그려 놓는다든지, 경찰차를 뒤집어엎든지, 아니면 맥도날드 직원을 향해 고양이를 던지는 행위였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진 섹스 소동이었다.
이 행위예술은 2008년 2월 모스크바의 티미랴제프주 생물학 박물관(Timiryazev State Biological Museum)에서 선보였다. 제목은 '왕위 계승자 새끼 곰을 위해 섹스하자(Fuck for the heir Puppy Bear)'였다. 당시 대통령 후보자였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메드베는 러시아로 곰을 말한다)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멤버들 간의 성행위로 표현했다. 즉, 정부의 목표인 생식력과 번식력을 '체제 전복적인' 행위로 나타냈다.
'받아들일까?/말까?' 받아들이자. 독재 체제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한 충격과 운동이었다. 그렇지만 고양이는 제발 건드리지 말자.
19.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The Artist Is Present)'
2010년 아브로모비치의 '예술가가 여기 있다'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세르비아 태생의 아브라모비치는 장장 736시간을 모마(MoMA)에서 한자리에 앉아 관객들을 맞이했다. '잠깐! 저 여자가 정말로 모마에서 750시간을 앉아 있었다고?'와 같은 신문제목과 수많은 연관 포스팅을 만들어 낸 엄청난 작품이었다.
뉴욕 매거진의 제리 솔츠는 이 작품에 대해 "이 작품은 나르시즘(자기애)적이고 과시성이 강하다. 또한 관객에게서 이를 끌어냈다. 자성적인 순환의 고리에서 말이다."라며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절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라고 평가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받아들이자.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매력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원히 행위예술의 할머니로 남을 것이다.
20. 크리스 버든(Chris Burden)의 "슛(Shoot)"
이 기사를 비토 아콘치로 시작했으니 크리스 버든으로 끝내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 크리스 버든은 1971년 갤러리 안에서 4m 거리에 있는 친구에게 자신을 22구경 소총으로 쏘게 했다.
'받아들일까?/말까?' 받아들이자. 버든도 그때의 일을 "아주 멍청한 짓"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후 40년간 이어진 그의 예술이 시작된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버든에게 그 경험이 남아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가 느꼈던 또 우리가 그를 통해 느꼈던 그 순간을."
보너스: 영화배우 제임스 프랭코가 하는 모든 행동
jamesfranco
이 미스테리를 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아, 하지만 괴짜 제임스 프랑코를 설명할 방법은 없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