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5일 토요일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위안부 콘돔' 오카모토, 국내 점유율 2위

'위안부 콘돔' 오카모토, 국내 점유율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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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콘돔 시장에서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의 오카모토 콘돔이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소에 콘돔을 공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OBS가 21일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강정숙 교수의 논문 '일본군 위안부제도와 기업의 역할'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오카모토 콘돔이 성병방지를 원하는 군부와 어떻게 손을 잡고 성장했는지 기술하고 있다.
1934년 공업소를 설립한 오카모토 콘돔은 1939년 임시육군동경경리부 지정공장이 된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논문은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을 앞두고 일본군이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수품창을 발족하자 오카모토 콘돔은 수품창 창장과 기업 창립자 간 인척 관계를 활용해 군부와 결합했던 것으로 분석했다.
뉴시스에 따르면 오카모토 콘돔은 군 납품을 통한 성장세에 힘입어 1944년에는 당시 조선 경성, 현재의 서울 용산 일대에 고무공업소를 건설해 그해 8월부터 제품을 생산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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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역사관에 전시 중인 사쿠의 모습
이렇게 생산된 콘돔(사쿠)은 위안소에 연행된 여성들에게 제한적으로 지급됐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편에서 펴낸 책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따르면 만주로 연행되었던 문필기 할머니는 “평일 낮에는 주로 내 옷을 빨거나 삿쿠를 씻었다. 군인들이 쓰고 간 삿쿠를 안팎으로 깨끗이 씻어서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가 다시 사용했다”
미얀마로 연행되었던 김복선 할머니는 “삿쿠는 우리에게 맡겼다. 그런데 삿쿠가 아주 귀했다. 그래서 한번 쓴 삿쿠를 병에 모아 두었다가 시간이 있을 때 냇가에 가서 빨았다. 비누로 씻어서 햇볕에 말린 다음 하얀 가루로 된 소독제를 뿌려 다시 사용했다. 이 일을 할 때가 제일 싫고 죽고 싶었다”고 구술 돼 있다.
'돌격일번(突擊一番)'이란 제품명이 붙어 있는 콘돔 사진은 지난달 말 일본 후지타병기연구소 사이트에 게재됐다. 이 사이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무기 등을 수집해 소개하고 있다. 사진에는 '돌격일번'이라고 적힌 빛바랜 콘돔 포장지와 밴드 부분만 남은 콘돔이 찍혀 있다. 돌격일번은 ‘돌격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사이트 운영자는 “일본군이 병사들의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돌격일번이라는 군 전용 위생 콘돔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배급했다”며 “윤활성분이 발린 요즘의 습식 콘돔과는 달리 고무로만 만들어진 건식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이름이 돌격일번인 이유는 적을 향해 돌격할 때 병사들이 머리 보호를 위해 철모를 쓰듯 성병 예방을 위해 성기에 콘돔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쿠키뉴스 2006년 11월 6일)
강정숙 책임연구원은 “당시 일본은 전쟁 말기로 후방에서는 콘돔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전방에서만 사용됐다”며 “콘돔이 전쟁물자로 가다시피한 상황에서 일본군의 목적에 맞게 독과점 상태로 물자를 제공하고 이익을 얻은 만큼 전범기업”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생산한 물자가 반인륜적인 전쟁 범죄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그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는 나눔의 집에 전시된 콘돔 한 점 역시 오카모토 콘돔의 전신인 국제고무가 생산한 제품이었다.
오카모토 콘돔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 시장점유율은 28.5%으로, 영국산 듀렉스 콘돔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한편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지난 6월 콘돔 회사를 시작한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의 장남인 박서원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O사가 그랬었구나.. 열받네... O사는 반드시 넘는다!!!"고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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