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3일 화요일

[한겨레] "쟤네 봐, 불쌍하지? 그러니까 공부해"

등록 : 2014.09.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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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학생·학자 국제지원펀드(SAIH)가 만든 ‘아프리카를 돕자-잘못됐어’(Let’s Save Africa-Gone Wrong) 동영상의 첫 장면. 사진 속 광고판에 등장하는 흑인 어린이는 이 동영상에서 ‘모금방송 전문배우’로 나온다. 이 작품은 아프리카 빈곤을 위한 모금 광고의 전형성을 풍자하고 있다. SAIH 누리집 갈무리

개발도상국 비극 부각시켜 상업적 효과…‘빈곤의 포르노’

“이거 봐, 여기는 이렇게 아이들이 죽잖아. 그런데 너는 이렇게 편하게 살고 부족한 거 하나 없는데 공부를 안 해? 부끄럽지 않아?”
개발도상국의 5살 미만 영유아가 예방하기 쉬운 질병으로 얼마나 어처구니없게 목숨을 잃는지 설명하는 거리 캠페인에서 한 여성이 아이에게 전단을 보여주며 한 말이라고 합니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이 23일치 칼럼 ‘가난, 아이, 시선’ 에서 소개한 사례가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자기 아이의 교육을 위해 타인의 불행 혹은 ‘불행할 것이라는 사회적 시선’을 도구 삼는 이런 발언은 사실 한국 부모들에게 일반적입니다.
어떤 부모는 노동조합의 파업 집회나 시민단체 회원의 1인 시위 현장을 지나가며 아이에게 “열심히 공부해야 저런 사람이 되지 않는 거야”라고 가르치고, 어떤 부모는 노숙자나 심지어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 노동자를 보고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저들과 그 아이가 더불어 사는 같은 공동체 시민이라는 사실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TV나 신문 등 미디어를 통해 자주 ‘눈길을 끄는 불쌍함’을 목격합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 아이들이 갈비뼈를 드러내는 앙상한 몸과 퀭한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동영상·사진은 국제구호단체 광고의 일반적인 클리셰입니다. 여기에 “하루 1000원, 한 달 3만원으로 어린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내레이션이 나오면 “술 한 잔 덜 마시지, 뭐”하며 선뜻 기부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기부라는 방식보다는 저들 국가 내부에 제도적으로 상대적 저소득층을 지원할 수 있는 공공 부조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기간에 그런 제도가 갖춰질 가능성이 크지 않으니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외국 시민들에게 ‘기부’를 요청하는 것이겠지요. 문제는 이런 ‘기부의 확장성’을 위해 김 부장의 칼럼이 지적하는 것처럼 △모금방송을 위해 필리핀의 가난한 아이를 촬영하러 간 제작진이 아이가 자신이 가진 가장 예쁜 옷을 성의껏 차려입고 나타나자 방송 내용과 맞지 않는다며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요구했다는 사례 △에티오피아 시골마을의 식수난을 촬영하러 간 한 방송사가 적절한 ‘그림’이 나오지 않자 가축이 이용하는 작은 연못에 아이를 데려가 물을 마시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시도했던 사례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아이를 촬영하면서 붕대를 풀라고 요구한 미디어 등이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더불어 기부를 빌미 삼아 공격적인 포교를 하는 행위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습니다. 다수의 국제구호단체가 특정 종교를 바탕으로 건립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 단체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돕는다는 취지보다는 특정 종교를 확장하는 데 더 치중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심지어 거리에서 책상을 펴놓고 국제구호단체 회원을 모집하거나 모금을 요청하는 이들 중에선 해당 국제구호단체 소속이 아니라 대행업체 소속으로 전문적으로 거리 모금 활동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 <한겨레>는 지난 3월 21일치 ‘세계 쏙’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는‘노르웨이 학생·학자 국제지원 펀드(SAIH·사이)’의 이야기 를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사를 보면,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비극을 부각시켜 상업적 효과를 거두는 이런 사진과 영상물에 대해 전문가들은 ‘빈곤의 포르노그라피’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케냐에는 4000여개의 국제 구호단체가 있는데, 어떤 한 단체는 멸종 위기의 코뿔소를 구하자며 자선 경매를 벌인 뒤 이에 대한 포상으로 나미비아로 코뿔소를 사냥하러 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는 얘기에서 우리는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기사는 ‘좋은 모금 광고’는 특정 저개발국가에 대한 동정보다 ‘보편적인 인류애’에 호소하는 광고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보편적인 인류애’를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을 대상화하는 미디어 이전에 우선 미디어를 통해서만 바라본 저개발국가 사람들에게 과도한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내려다보면서 자기 만족하는 우리의 시선부터 거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건 나의 만족보다는 도움의 대상이 언젠가 자력으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의 피해를 받지 않은 주체로 일어설 수 있는 날이 오는 것일 테니까요.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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